(토마토칼럼)행복한 임대주택
2018-10-31 06:00:00 2018-10-31 06:00:00
[뉴스토마토 박용준 기자] 사람들은 자기 집, 특히 아파트를 갖고 싶어한다. 심지어 임대주택에 사는 사람을 무시하고 혐오하기까지 한다. ‘휴거(휴먼시아 거지)’라고 비하하더니 이젠 ‘빌거(빌라 거지)’라는 말까지 나돈다니 정도가 지나치다.
아는 지인도 결혼을 준비하며 몇 달간 아파트만을 찾았다. 금수저도 아닌 그는 서울에 집 사는 건 둘째치고 은행 도움 없인 전세도 힘들었다. 경비원이 있어 안전하고, 주차공간도 넉넉하고, 편의시설이 많다는 이유로 한사코 아파트만 고집하던 그의 신혼집은 결국 아파트가 아니었다.
아파트라고 유토피아는 아니다. 유독 한국 사람들이 아파트를 사랑한다지만 옆집이 누군지도 모른 채 벽으로 나뉜 사람들, 침해받는 개인공간, 귀를 어지럽히는 층간소음 등 획일화되고 삭막한 주거문화는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얼마 전부터 임대주택에 살더라도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구현하거나 이웃이나 지역사회와의 어울림 속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내 집 마련의 꿈’을 붙잡기보단 적은 주거비를 지출하면서 ‘워라밸’을 찾는다니 요즘 사람들답다.
 
SH공사가 추진하는 ‘신호등 프로젝트’는 기존 임대주택과 달리 청년과 신혼부부들의 생활양식에 맞춘 다양한 선택·가변형 설계가 눈에 띈다. 청년주택엔 침실을 분리해 여가공간을 확보하고 수납공간을 더했다. 신혼부부주택도 자녀 수에 맞춰 아이공간과 ㄷ자 주방, 식료품 저장실 등을 갖췄다.
 
주택 내부 뿐만 아니라 단지에 배치된 무인택배, 피트니스, 세탁방, 가족도서관, 실내놀이터, 육아쉼터, 반려견 놀이터 등은 대형 아파트에서도 1~2개 이상 갖추기 어렵다. 임대주택이더라도 다른 아파트 못지 않은 디자인과 편의시설을 갖추고 주민들간의 거리를 좁히겠다는 의도다.
 
공동체주택은 여기서 한 발 나아가 자발적으로 원하는 주거문화를 그려나가는 흐름이다. 기존 아파트 생활에 질렸거나 이웃들과 함께 나이들고 싶다거나 함께 취미생활을 공유하는 등 공동체주택을 원하는 이유도 제각각이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노인들이 바쁜 신혼부부의 아이들을 돌보고, 재능을 살려 동네 아이들에게 공부방을 열고, 마당에서 함께 김장을 담그고 청년·노인들에게 밥·반찬을 제공하는 그림은 분명 아파트에서 보기 힘든 모습이다.
 
서울시 토지임대부 사회주택 1호인 녹색친구들 성산이 지난해 3월 첫 입주하기까지 많은 편견을 뚫어야 했다. 동네에 임대주택이 들어온다는 소리에 인근 주민들은 곱지않은 시선을 보냈고, 일부 주민들의 민원이 이어지며 공사가 지연되기도 했다.
 
1년 반이 지난 지금, 녹색친구들 성산은 성산동은 물론 인근 다른 동네에서도 찾는 핫플레이스가 됐다. 녹색친구들 성산의 1층 커뮤니티공간에 자리잡은 동네정미소 성산은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친환경 농산물을 1인가구도 먹을 수 있게 소량 판매하고, 맛있는 식사도 제공하며 주민들의 사랑방으로 바뀌었다.
 
무려 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주한 입주자들 또한 높은 만족도를 보이고 있다. 저마다의 이유로 새로운 주거문화를 찾아 사회주택을 선택한 입주자들은 결혼이나 이직 등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이사가는 경우가 현저히 낮게 나타나며, 입주자 모임과 지역 연계 프로그램도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SH공사의 신호등 프로젝트, 공동체주택, 사회주택 각자 조건은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지향하는 바는 비슷하다. 집의 가치는 입지, 가격, 호수만으로 결정되는게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채워나간다고 말이다.
 
‘행복한 임대주택’ 왠지 한국사회에서 역설처럼 들리는 말이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아파트 공화국’은 수명이 영원하지 못하다. 그 다음의 주거형태, 그 다음의 주거문화를 선택할 차례다.

 
박용준 사회부 기자(yjunsay@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진규 온라인뉴스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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