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손짓했고, 재계는 ‘화답’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의 방문에 호응해 대규모 투자와 고용계획을 내놨다. 한편으로는 적폐 청산의 한 축으로 재벌을 설정했던 정부와의 관계 개선 및 압박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삼성이 지난 8일 발표한 투자와 고용계획은 그 결정판이었다. 향후 3년 동안 모두 180조원을 투자해 약 4만명의 청년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대규모 청사진이다. 이를 통해 협력업체까지 포함해 70만명의 고용창출 효과가 기대된다는 것이 삼성의 설명이다. 삼성은 발표일을 김동연 부총리의 삼성전자 사업장 방문일을 피하는 배려도 보였다. 김 부총리가 재벌에게 투자를 ‘구걸’하러 간다는 청와대 등 일각의 비판적 시각을 다분히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김 부총리는 지난해 12월 LG를 시작으로 1월 현대차, 3월 SK, 6월 신세계, 이달 8일 삼성까지 여러 재벌그룹을 두루 방문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12월 현대차 충칭공장에 이어 올 2월 한화큐셀을 찾았고, 7월에는 인도 방문길에 삼성전자의 현지 휴대전화 공장 준공식에 참석했다. 각 그룹은 그 때마다 나름대로 투자와 고용계획을 제시했다. 한화도 김 부총리가 직접 방문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그룹과 마찬가지로 향후 5년간 22조원의 신규 투자계획을 내놨다.
이들 재벌이 발표한 투자 규모는 300조원을 넘는다. 일자리도 20만개 이상 창출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계획이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기존의 계획에서 다소 늘린 수준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시된 계획대로 집행되기만 한다면 상당한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장과 일자리 확대에 목말라 하는 문재인정부로서는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다.
이 가운데 1000명의 청년에게 소프트웨어 교육을 실시하겠다는 삼성의 계획이나 2만2000여명의 연구개발 인력을 채용하겠다는 LG의 계획 등 몇 가지 방안은 특히 주목을 끈다. 아울러 삼성이 제시한 180조원이나 SK가 발표한 80조원 투자계획은 눈이 휘둥그레지게 한다.
과연 그것이 진실한 것이며, 실현가능성이 있는지 반신반의하는 마음도 든다. 다소의 과장이 섞여 있고, 투자와 고용계획 사이에도 불일치가 개재된 것 같다. 이를테면 현대차는 향후 5년간 5대 신사업 분야에 23조원을 투입해 4만5000명 규모의 신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한 반면, 삼성은 국내에만 130조원을 투자한다고 하면서도 채용계획은 4만명 선에 지나지 않는다.
또 신세계는 향후 3년간 연평균 3조원 투자 및 매년 1만명 이상을 채용하겠다고 밝혔다. 한화도 22조원의 투자규모에 비해 채용계획 인원은 3만5000명에 이른다. 이 같은 계획을 종합해 보면 삼성의 투자계획은 일자리 창출의 측면에서 볼 때 가장 비효율적이다. 반면 신세계와 현대차, 한화는 그대로만 된다면 ‘효과만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삼성의 고용계획은 2025년까지 총 10조원을 투자해 일자리 9만개를 창출하겠다고 한 국영기업 가스공사와 비교하면 더욱 대조적이다.
업종별 특성에 따라 소요인력이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점을 감안해도 투자계획과 인력채용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엿보인다. 어느 쪽이든 다소 과장이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성이 70만명의 고용유발 효과를 함께 제시한 것은 이런 괴리를 덮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한다. 아니면 직접고용은 하지 않고 대부분을 협력업체 부담으로 넘기겠다는 심사가 아닌지 의문을 떨칠 수 없다.
또 일부 그룹에서는 김동연 부총리를 향해 어려운 요구를 제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 당국자들이 ‘규제완화’를 부쩍 강조하는 분위기를 틈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고용 사정의 악화로 말미암아 고민이 많은 정부의 처지를 십분 활용하려는 것 같다. 재벌로서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는 것이다.
재벌의 요구사항에 대해 지금 일일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문 대통령과 김 부총리의 노력도 폄하될 수 없다. 경제성장과 고용증대를 위해 재벌의 적극적인 협조를 이끌어내려는 그 노력을 어찌 깎아내릴 수 있겠는가. 도리어 이번에 나온 투자계획이 되도록 실천에 옮겨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정부도 가능하면 재벌의 희망사항을 들어주려고 하겠지만, 고민은 많을 것이다. 정녕 불필요한 규제가 있다면 이 기회에 정리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지만 무조건 들어주는 것도 곤란하다. 충분한 숙고와 논의를 거쳐 합리적으로 해결하면 된다. 각종 규제 가운데 경제를 어렵게 하는 것도 있겠지만, 오히려 기업을 튼튼하게 하는 것도 있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사리분별이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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