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로 시끄럽다. 사회적 불안이 야기되면서 초동대응 실패 등 정부 대처에 대한 지적과 함께, 정부의 존재가치를 묻는 본질적 의문마저 팽배하다. 이쯤 되면 무능을 넘어 존재 자체가 국민에게 불행이라는 소리가 나올 법하다.
문제의 본질은 통제에 대한 권력의 시대착오적 망상에 있다. 이는 관리에 대한 자신감과 다르다. 국민 안전보다 정권 안위를 최우선 가치에 두면서, 정부는 정보를 틀어쥐고 국민의 귀를 막는 데 주력했다. 군사정권 시절 못된 버릇은, 40년 넘는 시간의 차이에도 현 정부를 운용하는 경험적 토대가 됐다.
잘못된 통제는 혼란만 키웠다. 정부가 입을 닫고 면피로 일관하는 사이 국민은 “가만히 있으라”던 세월호의 악몽을 떠올려야 했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에 귀를 기울이며 나를, 그리고 가족을 지켜야 했다. 마스크를 쓴 채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봐야 했으며, 아이들의 등교를 막아야 했고, 병원 출입을 기피해야 했다. 심지어 평택은 사람 발길 하나 없는 유령도시가 된 채 하루하루를 공포에 떨어야 했다.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를 우리는 지난 18일 동안 경험했다.
보다 못한 여당마저 메르스 감염의 진원지가 된 병원 공개를 주장하고 나섰지만, 이는 철저히 묵살됐다. 국회법 개정을 야당과 합의한 새누리당 지도부에 대한 불쾌감 때문이었다. 국민 안전보다 청와대 주인의 심기가 우선되면서, 당·정·청 협의도 묵살됐다. 국가위기 사태는 청와대의 오만과 독선 앞에 재앙으로 번졌다.
한 편의 코미디는 서울시를 비롯한 지자체의 항명(?)에서 금이 갔다. 몇몇 언론의 용기도 통제의 둑을 허무는 데 도움이 됐다. 메르스 환자가 발생하고 경유한 병원명이 공개되면서 국민은 위험지역에 대한 정확한 인지와 함께 대처가 가능해졌다. 감염 경로에 대한 시간대별 역추적도 이뤄지면서 사태는 비로소 수습 가능한 국면으로 전환이 가능해졌다.
메르스 사태를 뒤로 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미국 방문길에 오를 예정이다. 그에게 이번 사태가 남긴 교훈은 없어 보인다. 당연히 책임 통감도, 사과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의 이번 행보를 보며 왜적이 쳐들어오자 백성과 궁궐을 버리고 의주로 파천에 나선 선조가 떠올려진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정권의 정통성은 매 순간 민심에서 읽어야 한다는 점을 망각하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고대한다.
김기성 탐사부장 kisung012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