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장 많이 들었던 영어단어 중 하나는 아마도 ‘테이퍼링(Tapering)’일 것이다. 테이퍼링은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긴축(Tightting)이라는 단어를 대신해 사용하면서 대두된 말로, 양적완화 정책의 축소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올해는 미국의 테이퍼링이 본격 시행되는 해다. 연방준비제도(Fed)는 1월부터 월 850억달러인 국채와 모기지채권 매입 규모를 750억달러로 100억달러 축소하기로 했다.
이런 미국발 출구전략은 신흥국에게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미국이 그동안 풀었던 유동성을 거둬들이면 달러가 강세를 보이면서 신흥국 통화는 평가절하되고, 무역적자, 인플레이션과 같은 위기 우려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신흥국은 지난해 6월 한차례 벤 버냉키 의장의 양적완화 축소 시사만으로도 금융시장이 패닉을 경험한 바 있다.
취약통화를 가진 신흥국은 인도, 브라질, 터키, 인도네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 꼽힌다. 이들 국가들은 모두 경상수지 적자가 심하고 물가상승 부담이 커, 위험회피 심리가 살아나면 자금 유출 가능성이 큰 나라들이다. 또, 그동안 단기성 투자자금, 즉 핫머니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최근 일고 있는 국가 내부의 정치불안까지 더해진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수도 있다.
실제로 신흥시장 펀드에서는 최근 9주 연속 자금이 빠져나갔다. 최근 한 주 동안 빠져나간 돈만 12억7000만달러를 넘어선 반면 선진시장 펀드로는 최근 일주일 사이 38억6000만달러나 유입됐다.
신흥국들의 처방이 신통치 않다는 것도 문제다. 지난해 통화가치 급락을 경험한 신흥국들은 금리인상을 단행하며 추가적인 통화가치 하락을 방어하려 애쓰는 중이다. 하지만, 이미 인도의 경우 7.75%, 인도네시아 7.5%, 브라질 10% 등으로 기준금리를 인상한 상태여서 향후 운신의 폭이 넓지 않다. 달러 강세로 이자부담이 증가할 것이란 우려도 향후 신흥국들의 금융시장 변동성을 키우는 요인이다.
하지만, 테이퍼링 때문에 신흥국 위기가 지난 1997년 외환위기처럼 확대되진 않을 것이다.
지난 1991년 인도의 외환위기,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와 달리 인도와 인도네시아 등 신흥국들은 많은 외환보유액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이미 지난 여름 테이퍼링 예고 당시 시장금리가 크게 오르는 등 시장이 두려움을 상당 부분 흡수했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신흥국이 변동환율제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도 눈 여겨 봐야 한다. 자금 이탈에 따른 통화가치 평가절하는 해외시장에서 이들의 제조업 경쟁력을 높이며 기업들의 수출 증대라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Fed 의장 교체와 테이퍼링 본격 시행이 맞물린다는 점이 부담스럽지만, 테이퍼링은 본격적인 긴축기조로의 전환이 아니라 완화적인 통화정책의 강도 조절이라는 제한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지난달 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연준의 정책기조 변화는 시장과 충분한 소통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정책의 집행에 따른 충격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찾아가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미국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신흥국들이 미국의 테이퍼링에 충격을 안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Fed의 통화정책이 신흥국 경제의 핵심 변수는 아니다. 각 나라가 경제를 어떻게 이끌고, 환율 변동에 어떻게 대비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다시 말해, 미국의 테이퍼링이 신흥국에 재앙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만큼 글로벌 금융위기 시즌2가 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막연한 불안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위기에 대한 안일한 인식만큼이나 가능성을 과장하는 것도 잘못된 접근이다.
이제 테이퍼링에 대한 본격적인 테스트가 시작됐다. 갑오년(甲午年) 청마(靑馬)의 해, 신흥국 경제가 테이퍼링이라는 장애물을 뛰어넘어 말처럼 힘차게 도약하길 기대해본다.
김선영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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