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2권 「꽃피는 아가씨들의 그늘에서」의 서사는 화자가 해안 도시 발베크로 향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어린 화자가 이 도시로 간 이유는 극심한 신경쇠약과 천식이라는 육체적 고통을 달래기 위한 요양의 목적이 컸으나, 그 이면에는 스완과 화가 엘스티르를 통해 전해 들은 발베크 성당의 중세풍 조각과 바다의 신비로운 풍경에 대한 미학적 갈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요양과 예술적 감상을 기대하며 도착한 '그랜드 호텔'에서 그를 먼저 맞이한 것은 서정적인 바다 풍경이 아니라, 철저한 계급도(圖)와 빈틈없는 매뉴얼로 무장한 근대적 관료주의의 견고한 성채였다.
20세기의 지배적 경영철학은 프레데릭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론이 지배했다. 테일러주의를 공장 생산 라인에 이식한 헨리 포드의 포드주의는 인간 노동을 표준화했다. 신차 생산을 위한 도장공장의 생산 라인 모습이다. (사진=뉴시스)
관료주의 성채의 정점 : 부동(不動)의 지배인
호텔이라는 소우주는 그 자체로 20세기 초 유럽 사교계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압축해 놓은 공간이다. 이곳의 중심에는 호텔 지배인이라는 인물이 우뚝 서 있으며, 그는 고객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개인적인 환대를 정교하게 계급화·차등화하면서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속한 (서비스) 조직의 정당성과 권위를 세우는 데 몰두한다. 프루스트는 이 지배인을 마치 신화 속의 인물처럼 묘사하며, 그가 가진 관료적 권위의 기이함을 포착해 낸다.
"그랜드 호텔의 지배인은, 어쩐지 피할 수 없는 필연성처럼, 내게 그 말의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의 '지배인'으로 보였다. — 솔직히 말하면 나에게는 아직 낯선 유형의 지배인이었는데, […] — 이 지배인은 나를 맞이하면서 부동의 위엄과 말없이 드러나는 우월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는데, 마치 폐위된 판테온의 신 가운데 하나이거나, 현대 도시 한가운데서 여전히 그 모조 형상을 볼 수 있는 우상 중 하나인 것 같았다(Le directeur du Grand-Hôtel, qui, par une sorte de fatalité, me parut être, au sens le plus plein du mot, le Directeur, — le Directeur d’un genre à vrai dire encore inconnu de moi, [...] — ce Directeur avait, pour m’accueillir, une attitude de majesté immobile et d’une muette condescendance, comme s’il eût été un de ces dieux d’un Panthéon détrôné, ou une de ces idoles dont on voit encore le simulacre au milieu d’une cité moderne)."
— Marcel Proust,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Tome II, À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 Gallimard, Bibliothèque de la Pléiade, 1988.
이 지배인이 상징하는 '부동의 위엄(majesté immobile)'은 20세기 초 경영학을 지배한 막스 베버의 관료제와 프레데릭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론의 정점을 보여준다. 테일러주의와 함께, 테일러주의를 공장 생산 라인에 이식한 헨리 포드의 포드주의는 인간의 노동을 표준화하고 전문화하여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데 성공하였고 20세기의 지배적 경영철학이 되었다.
이 '통제와 명령(Command and Control)' 철학은 이후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에서 '폭포수(Waterfall) 모델'로 계승되었다. 1970년 윈스턴 로이스가 비판을 가하기 위해 검토한 이 모델은 역설적이게도 경영 현장에서 가장 선호하는 표준이 되었다. 모든 단계가 위에서 아래로 선형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이 강박은 테일러주의 관점의 예측 가능성을 시스템화하여 효율을 제고하였으나, 동시에 부서 간의 장벽을 쌓고 의사결정의 속도를 늦추는 사일로 현상의 원인이 되었다. 지배인이 로비에 부동의 자세로 서 있는 동안, 현장의 생생한 정보는 위계의 계단을 오르다 휘발하곤 했다.
애자일 혁명
이러한 경직된 시스템은 1980년대 후반 그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1987년 미 육군 전쟁대학에서 냉전 이후 극도로 불확실한 정세를 표현하기 위해 고안된 VUCA(변동성, 불확실성, 복잡성, 모호성) 환경이 도래하면서, 중앙집권적 통제 모델은 파산 선고를 받았다. IT 업계 역시 산업화 시대의 선형적 관리 방식으로는 지식 정보화 시대의 복잡성을 감당하지 못하는 '소프트웨어 위기'에 직면하였다.
프루스트가 소설에서 묘사한 승강기 소년의 모습 그대로이다. 소년은 말하자면 테일러주의 분업이 낳은 기계적 존재의 상징이다. 그는 위와 아래라는 이진법적 공간에 갇혀, 인격적 개입이 소거된 채 버튼을 누르는 역할만을 수행한다.
"그는 모든 기계적 직무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격이 없는 존재였다. 왜냐하면 그의 일은 오직 그곳에 있는 것과 층수를 틀리지 않는 것만을 요구했기 때문이다(C’était, comme dans toutes les fonctions mécaniques, un être qui n’avait pas de personnalité, car son travail n’exigeait de lui que d’être là et de ne pas se tromper dans les étages)."
— Marcel Proust,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Tome II, À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 Gallimard, Bibliothèque de la Pléiade, 1988.
'승강기'에 갇힌 것 같은 위기감 속에서 2001년 2월 미국 유타주 스노우버드(Snowbird)에 켄 슈와버, 제프 서덜랜드, 앨리스테어 콕번 등 당대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였다. 이들은 라이벌 의식을 내려놓고 2박 3일의 격론 끝에 '애자일 소프트웨어 개발 선언문(Manifesto for Agile Software Development)'을 발표했다. 이후 통상 ‘애자일 매니페스토’로 인용되는 이 선언은 기술 혁신의 방법론이 아니라, 인간을 생각 없는 부품으로 전락시킨 테일러주의에 대한 반발이자 인본주의의 회복을 외친 경영학 혁명으로까지 평가된다.
그러나 중심엔 여전히 인간이 아닌 효율성이 자리하고 있기에 완전한 인간중심주의라기보다 인간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더 큰 효과를 내는 성과중심주의로 보는 게 더 타당하겠다. 이들은 기존 방식에 반기를 들며 ▲공정과 도구보다 개인과 상호작용 ▲포괄적인 문서보다 실행되는 소프트웨어 ▲계약 협상보다 고객과 협력 ▲계획을 따르기보다 변화에 대응이란 4가지 핵심 가치를 천명했다.
이 혁명은 IT 영역을 넘어 기업 조직이론 전반의 변화를 촉발했다. 모든 기업이 소프트웨어 기업화하는 디지털 전환(DX) 시대를 맞아, 시장의 피드백에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애자일 방식은 비즈니스의 새로운 표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애자일의 심장 : 임파워먼트와 서번트 리더십
애자일의 대표적 이론가 앨리스테어 콕번(Alistair Cockburn)은 이러한 기계성을 타파하기 위해 '애자일의 심장(Heart of Agile)'이라는 프레임워크를 통해 협업(Collaborate), 전달(Deliver), 성찰(Reflect), 개선(Improve)의 네 가지 가치를 강조했다. 그리고 이 가치가 실제로 작동하기 위한 필수 전제 조건으로 임파워먼트(Empowerment)를 꼽았다. 권한이 부여되지 않은 팀은 스스로 협업의 방식을 개선할 수도, 고객에게 직접 가치를 전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임파워먼트의 학술적 토대는 하버드 대학교 리처드 해크먼(J. Richard Hackman) 교수의 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해크먼은 『팀을 승리로 이끄는 5가지 조건』(2002년)에서 ▲실질적인 팀(Real Team, 명확한 경계와 안정성을 가진 팀) ▲도전적 방향성(Compelling Direction, 도전적이고 구체적인 목표) ▲실천적 구조(Enabling Structure, 실질적 업무 설계와 규범) ▲지원체계가 갖춰진 조직 환경(Supportive Context, 보상, 정보, 교육 시스템 등) ▲전문가의 코칭(Expert Coaching) 등이 갖춰질 때 진정한 임파워먼트가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소설 속 발베크의 승강기 소년이 호텔의 데이터를 공유받고, 코칭을 통해 스스로 문제 해결사로 거듭났다면 그는 인격 없는 부품이 아닌 현장의 지배인이 되었을 것이다.
임파워먼트의 자율적 권한 부여를 구체적인 운영 체계로 정립한 것이 바로 제프 서덜랜드(Jeff Sutherland)와 켄 슈와버(Ken Schwaber)가 공동 집필한 '스크럼 가이드(The Scrum Guide)'다. 미 공군 전투기 조종사 출신으로 생물학 복잡계 이론에 정통했던 서덜랜드와 소프트웨어 공학의 베테랑인 슈와버는, 애자일이라는 거대한 철학적 지향을 조직이 실제로 따라야 할 '실천의 서'로 작성했다. '스크럼 가이드'는 단순히 규칙의 나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애자일이 추구하는 추상적 가치를 조직이 어떻게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지 규정한 최소한의 지침이었다.
여기서 애자일(Agile)은 최고 규범인 헌법이라고 할 수 있다. 헌법이 국가의 존립 근거와 국민의 기본권을 정의하듯, 애자일 선언문은 조직이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해서는 안 될 근본 정신과 가치를 선포한다. '스크럼 가이드'는 그 헌법 정신을 실생활에서 구현하기 위한 법전(Code)과 같다. 헌법(애자일)이 왜(Why) 이 길을 가야 하는지에 관한 철학적 토대를 제공한다면, 법전(스크럼 가이드)은 그 정신을 현실에서 위배하지 않으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떻게(How) 행동해야 하는지 규정하는 절차와 형식을 제공한다.
스크럼 가이드는 이처럼 애자일이라는 헌법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역할(Role), 이벤트(Event), 산출물(Artifact)을 정의한다. 가이드는 조직이 복잡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고정된 매뉴얼에 의존하는 대신 투명성(Transparency), 검사(Inspection), 적응(Adaptation)이라는 경험주의적 통제력을 회복할 것을 권고한다.
특히 이 가이드에서 정의하는 '스크럼 마스터(Scrum Master)'는 발베크 호텔 지배인처럼 군림하는 지시자가 아니라, 팀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방해물을 제거하고 지원하는 '서번트 리더(Servant Leader)'로 규정된다. 권력을 독점한 우상을 파괴하고 현장의 구성원에게 의사결정의 주도권을 되돌려주는 과정이며, 소설의 예로 돌아가면 호텔이라는 거대한 기계를 생동감 넘치는 유기적 공동체로 탈바꿈하는 핵심 기제가 된다.
중국 가전 기업 하이얼(Haier)은 '인단합일' 기반의 '소마이크로(Small Micro)' 모델을 구축했는데 거대 기업을 수천 개 소규모 독립 사업체로 해체하고 그들을 독립적 경영 주체가 되게 했다. 지난 2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하이얼 제품 출시 행사에서 참석자들이 제품을 체험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애자일 전쟁
애자일 조직론의 강력함은 현대 전장에서도 증명된다. 스탠리 맥크리스털(Stanley McChrystal) 미군 장군은 저서 『팀 오브 팀스(Team of Teams)』(2015년)에서 이라크 전쟁 당시 알카에다 같은 네트워크형 조직을 상대하며 겪은 통찰을 공유한다. 그는 사령부의 명령만을 기다리는 전통적 관료제 군대로는 현장에서 즉각 판단하고 흩어지는 적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정보의 전면 공유와 권한 이양된 실행(Empowered Execution)이라는 방식을 도입했다.
2026년의 중동 전쟁에서 이란 지도부를 제거하는 미국의 '참수작전'이 결정적 승리를 가져오지 못하는 이유 역시 이 통찰과 맞닿아 있다. 이스라엘이나 미국이 이란이나 헤즈볼라, 하마스의 고위 지도자를 제거하더라도, 그들의 하부 조직은 이미 애자일한 네트워크로 진화하여 리더 부재 시에도 각 세포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회복탄력성을 갖추고 있다. '머리'가 잘리면 몸통이 마비되는 발베크 호텔식 위계 조직과 달리, 모든 마디(Node)에 분산된 지능이 깃든 구조다.
미국이 과거 베트남이나 아프가니스탄에서 고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면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정권을 상대할 때는 '머리'에 대한 최대 압박 전략이 상당한 효과를 거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과 전쟁에서 당혹감을 느낀 까닭은, 이란 국가 내에 집요한 생명력을 지닌 임파워먼트한 하부 조직의 전의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도자 한 명을 제거해도 수천 명의 임파워먼트한 '승강기 소년'이 각자의 전장에서 응전을 지속하는 한, 국가 수준의 전통적인 화력 우위는 생각보다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러한 군사적 구조는 중국 가전 기업 하이얼(Haier)이 실현한 '인단합일' 기반의 '소마이크로(Small Micro)' 모델과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하이얼은 장루이민 회장의 주도하에 거대 기업을 많으면 수천개 소규모 독립 사업체로 해체해 각 팀이 스스로 인사, 예산, 의사결정권을 가진 독립적 경영 주체가 되게 함으로써, 중앙의 통제 없이도 시장 변화에 초단위로 반응하는 생태계를 구축했다. 하이얼은 1만명이 넘는 중간 관리직을 제거하고 기업을 거대한 스타트업의 플랫폼으로 탈바꿈했다.
발베크 그랜드 호텔 지배인이 가졌던 '부동의 위엄'은 현대 경영에서 거대한 리스크일 뿐이다. 이제 리더의 역할은 군림하는 신이 아니라 팀의 길을 터주는 조력자이자 '서번트 리더'로 완전히 전환돼야 한다. 중앙 사령부가 사라져도 각 세포가 스스로 생존하고 번식하는 '자기 조직화(Self-organization)' 능력이야말로 VUCA 시대의 진정한 생존 전략이다.
[안치용의 Critique : 시스템의 틈새를 흐르는 인간의 진실]
발베크 그랜드 호텔의 비극은 시스템이 미비해서가 아니라 그 시스템이 인간을 지워버렸기 때문에 발생한다. 화자가 발견한 미세한 균열들, 즉 지배인의 어색한 말투나 하인들의 은밀한 속삭임은 시스템이 통제할 수 없는 생동하는 생명력의 증거다. 현대 경영이 관료주의를 버리고 애자일로 향하는 것은 그저 반응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계로 전락한 노동자에게 인격과 권한을 되돌려주어 그 잠재력을 시장의 가치로 전환하기 위해서다.
진정한 혁신은 시스템의 정교함이 아니라,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인간의 돌발성을 어떻게 조직의 창의적 자산으로 승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잃어버린 경영의 시간은 관료제의 철장에서 나와,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삶의 지배인이 된 인간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되찾을 수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효율성이 만나는 지점, 그곳이 바로 현대 경영이 나아가야 할 발베크의 진짜 바다다.
안치용 ESG비즈니스리뷰 발행인 겸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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