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뉴스토마토 강석영 기자] 공안당국의 간첩 수사는 떠들썩하게 보도됩니다. 하지만 법원에서 무죄가 난, 이른바 '간첩 조작' 시도는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윤석열씨가 12·3 계엄을 선포할 때 명분으로 내세웠던 ‘민주노총 간첩단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국가정보원과 검찰은 신동훈 제주평화쉼터 대표를 간첩단 조직원으로 지목했습니다. 신 대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북한의 지령을 받는' 간첩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1·2심 법원은 신 대표에게 거푸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처음부터 혐의를 입증할 증거는 없었던 겁니다. <뉴스토마토>는 지난 23일 제주도에서 신 대표와 법률대리인인 고부건 변호사를 만났습니다. 이들은 “간첩은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뉴스토마토>는 신 대표와 고 변호사의 이야기를 토대로, 공안당국이 사건을 조작하는 과정을 좇았습니다. (편집자)

2023년 1월, 국가정보원이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을 여러 개 수사하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라 나왔습니다. 당시는 국정원이 60년 만에 대공수사권을 폐지키로 하고, 유예기간을 두고 있던 시점입니다. 그런데 국정원이 수사하는 국보법 위반 사건 중엔 이른바 ‘민주노총 간첩단 사건’도 있었습니다. 공안당국은 석모 전 민주노총 조직국장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총 전·현직 간부 4명이 북한 문화교류국을 ‘본사’로, 자신들은 ‘지사’로 지칭하면서 본사 지령에 따라 비밀 지하조직을 만들고 반국가적 범죄를 저질렀다고 했습니다.
공안당국은 북한 지령을 받은 지사의 일원으로 신동훈 제주평화쉼터 대표를 지목했습니다. 석 전 국장 회유로 지하조직원 ‘인입 5단계 과정’(북한이 임무를 부여할 지하조직원 뽑는 절차)을 거쳤고, 문화교류국 승인도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공안당국이 신 대표에게 씌운 혐의는 국보법 8조(회합·통신 등) 위반입니다. 신 대표가 2017년 9월13일 캄보디아 프놈펜의 호텔에서 석 전 국장 지시로 문화교류국 공작원들과 접선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1·2심 법원은 신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법원은 검찰 공소사실에 대해 “증거가 없다”, “추상적인 가능성에 불과하다”라고 판시했습니다. 국정원과 검찰이 상상에 기반해 수사·기소했다고 지적한 겁니다.
사업차 만났는데 알고 보니 북한 공작원?
신 대표가 석 전 국장 소개로 북한 공작원을 만난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 대표는 이들이 공작원이라는 걸 몰랐고, 석 전 국장이 ‘사업에 도움을 줄 사람’이라고 해서 만났다고 주장합니다. 또 신 대표가 북한 공작원과 만났다는 것만으로는 국보법 위반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국보법 위반은 스스로 △만남의 상대가 반국가단체 구성원인지 △만남이 국가 존립·안전 등을 위태롭게 하는지 인식했어야 합니다.
신 대표는 2004~2007년 민주노총 활동을 하며 석 전 국장과 연을 맺었습니다. 오래된 인연이지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사업과 활동 과정에서 갈등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신 대표는 2007년부터 주식회사 연대와전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규모 사업장 노조를 상대로 현수막·의류 등을 제작·납품하는 사업입니다. 특히 이 사업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로 석 전 국장과 관계가 단절됐습니다.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 청사. (사진=뉴시스)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된 건 2017년 무렵입니다. 2017년 1월 이주노동 활동으로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됐고 같은 해 여름엔 관계 회복 차원에서 해외여행까지 같이 가게 됐습니다. 신 대표는 당시 연대와전진의 극심한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석 전 국장과의 관계를 개선하면 이득을 볼 수 있을 걸로 기대했습니다. 실제로 석 전 국장은 ‘회사가 힘들었을 텐데 앞으로 도와주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신 대표는 당시 상황에 대해 “석 전 국장은 민주노총 발주 담당자 중 한 명이다. 대규모 사업장과도 연결돼 있다”며 “기회만 됐다면 석 전 국장의 비행기값도 내줬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던 중 석 전 국장은 여행지로 선택한 캄보디아에 도착하자 “사업에 큰 도움을 줄 사람을 소개하겠다”고 했습니다. 다만 그의 정체는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신 대표는 그렇게 석 전 국장 소개로 ‘성명불상’의 남성 2명과 4시간가량 대화를 하게 됐습니다.
신 대표는 당시에 관해 “해외 대량 주문을 기대하면서 사업을 설명했지만, 상대는 대뜸 해외 출장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면서 “오히려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하길래 ‘따이공’(보따리상)인 줄 알았다. 그래서 주문량이 확정돼야 출장이 가능하다고 하니까, 그들은 ‘좋은 인연이 될 뻔했는데 아쉽다’며 가버렸다”고 했습니다. 이에 석 전 국장에게 ‘이게 뭐냐’며 항의했더니 그가 사과를 하면서 상황은 마무리됐다는 겁니다.
법원, 증거 없는 소설 같은 주장 모두 기각
2023년 신 대표는 ‘6년 전의 단 한 번의 만남’ 탓에 간첩이 됐습니다. 하지만 국정원의 대대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신 대표가 북한의 지령이나 공작금을 받았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유일한 증거는 국정원이 캄보디아에서의 신 대표 행적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한 영상입니다. 신 대표는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을 때 국정원이 6년 전 캄보디아에서 자신을 촬영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습니다. 영장도 없는 미행이었습니다. 더구나 국정원이 찍은 영상에선 소리가 삭제된 상태였습니다. 국정원은 그 이유에 관해 수사 기밀을 강조했습니다. 당시 영상을 누가 찍었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증거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있었습니다.
신 대표는 2023년 1월 민주노총 간첩단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지 넉 달 만인 5월10일 검찰로부터 기소됐습니다. 그사이 국정원과 검찰에서 각각 4차례, 총 8차례나 수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재판에 돌입하니 검찰은 국정원 영상 속 신 대표의 모습을 바탕으로 인물들의 의도를 추정하며 유죄를 주장했다는 겁니다. 신 대표에 따르면, 당시 검찰은 “신동훈과 공작원이 (접선을 시작하며) 눈빛 교환을 했다”, “신동훈은 공작원을 인식했음에도 모르는 척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접선하는 전형적 모습”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검찰은 또 “외국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과 4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때우는 일’을 쉽게 상정하기 어렵다”며 “국가 존립·안전과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해악을 끼치기 위한 구체적 논제에 대해 상세히 대화를 나눴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했습니다. 신 대표의 혐의를 입증할 명확한 증거가 없으니 추측만 내세운 겁니다.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로비. (사진=뉴시스)
1심을 심리한 수원지법 형사14부(재판장 고권홍 부장판사)는 검찰의 모든 주장을 기각했습니다. 재판부는 “(석 전 국장이 ‘만나보라’고 권유한 사람을 기다리는) 신 대표의 모습은 제3자가 보기에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는 행동으로서, 은밀히 북한 공작원을 접선하려는 모습으로 보기에는 매우 어설프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검사는 신 대표가 북한 공작원과 공원에서 눈빛 교환을 했다고 주장한다”며 “그러나 영상에 의하면 공작원이 신 대표 옆으로 지나가며 힐끗 쳐다보았으나, 당시 신 대표는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어 이를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반면 재판부는 신 대표 측 주장은 모두 인정했습니다. 재판부는 “(신 대표는) 당시 상황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고, 진술들 사이 모순되는 부분이 없으며, 당시 처한 상황에서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내용들로서 신빙성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재판부는 아울러 △민주노총 정책과 활동 방향에 신 대표가 영향력을 행사할 지위에 있다고 보기 어려운 점 △프놈펜 만남 이후 석 전 국장과 다시 다툼이 발생해 약 5년간 연락하지 않은 점 △다수의 지령문·보고문에서 신 대표를 지칭하는 내용이 없는 점 등을 무죄 이유로 들었습니다.
2023년 1월18일 국정원이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다음날인 19일 민주노총 출입문에 '공안탄압 중단하라' 등의 문구가 적힌 종이가 붙었다. (사진=뉴시스)
검찰은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습니다. 검찰은 북한의 지령문 등에서 신 대표가 언급되지 않은 점, 신 대표가 석 전 국장과 연락하며 회합과 관련된 내용을 논의한 자료가 확인되지 않는 점은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증거 없음’을 유죄 근거로 들었습니다. 검찰은 항소이유서에서 “신 대표가 석 전 국장 등과 달리 관련 증거를 진작에 완전히 폐기해 인멸했을 가능성 또한 존재하는 이상 신 전 대표에게서 관련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관련 자료를 보유한 적이 없다는 의미가 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2심을 담당한 수원고법 형사2-3부(재판장 박광서 부장판사)는 이런 검찰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검사는 증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신 대표가 증거를 인멸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취지로 주장하나, 이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가능성에 불과하다”며 “신 대표가 증거인멸을 시도한 것으로 볼 만한 정황이 없고, 압수수색 절차에서도 신 대표에 대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판시했습니다.
그런데도 검찰은 멈추지 않고 대법원에까지 상고했습니다. 이에 대해 신 대표는 “(검찰에선) 제가 간첩이란 결론이 정해져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신 대표는 기나긴 법정 다툼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보법 위반 사건은 유죄추정의 원칙이 작동합니다. 국정원과 검찰이 ‘아니면 말고 식’으로 던지면 피고인이 스스로 무죄를 입증해야 합니다. 공안당국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놓고 사과는커녕 계속 상소해 괴롭히고 있습니다.”
제주=강석영 기자 ksy@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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