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진아 기자] 관세로 전 세계를 혼란에 밀어 넣은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엔 감세 폭탄을 던졌습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규모 감세 법안은 가뜩이나 심각한 수준에 이른 미국의 재정 적자를 더 키울 수 있다는 우려에 불을 지피며 미국 주식과 채권, 달러 가격을 떨어뜨렸습니다. 미국 장기국채 금리는 급등(국채 가격 급락)했고, 달러화와 뉴욕증시의 3대 주가지수는 동반 급락하면서 금융시장이 요동쳤습니다. 미국 금융시장의 불안으로 주요국 국채 등 글로벌 금융시장도 흔들렸습니다. 세계 경제 질서의 중심축이 돼 온 달러화 패권 지위와 안전자산으로서 미 국채의 신뢰성에 금이 가면서 또다시 '셀 아메리카'(미국을 팔아라) 공포가 확산하는 모습입니다.
트럼프 대규모 감세안에…30년물 '5%' 돌파
21일(현지시간) 뉴욕증시에서 다우존스30산업평균지수는 전장보다 816.80포인트(-1.91%) 내린 4만1860.44에 장을 마감했습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도 전장 대비 95.85포인트(-1.61%) 떨어진 5844.61에,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지수는 270.07포인트(-1.41%) 밀린 1만8872.64에 각각 거래를 끝냈습니다. 최근 한 달간 빠른 회복세를 보여온 뉴욕증시 3대 지수는 한 달 만에 가장 큰 낙폭을 기록했습니다.
지난 16일 세계 3대 신용평가사 무디스의 미국 국가신용등급 하향 조정 이후 불안한 흐름을 보이던 미국 국채 금리는 이날 본격적으로 상승하면서 주가에 부담을 줬습니다. 실제 전자거래 플랫폼 트레이드웹에 따르면 30년 만기 미 국채 수익률은 이날 증시 마감 무렵 5.09%로 전장 대비 12bp(1bp=0.01%포인트) 급등하면서 지난 2023년 11월 초 이후 1년6개월여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습니다. 또 20년물은 5.12%로 13bp 급등했고, 글로벌 채권 금리의 벤치마크인 10년물은 4.60%로 11bp 올랐습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장기물 중심으로 미 국채를 팔아치우면서 채권 가격과 반대로 움직이는 금리가 급등세를 보인 것입니다.
미 국채 금리 급등의 트리거는 트럼프 행정부의 대규모 감세안이었습니다. 무디스의 미국 국가신용등급 강등 여진이 지속되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이 감세 법안 의회 통과를 위해 공화당 강경파를 압박하고 법안 통과 가능성이 커지면서 재정 적자 확대 우려를 키웠습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미국 재정 적자가 더 악화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투자심리가 위축됐고, 이는 미 국채 매도 압력을 키웠다는 분석입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공화당 의원들을 만나 대규모 감세안을 담은 '메가 빌' 처리를 압박했습니다. 공화당 소속인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은 오는 26일부터 의회가 메모리얼데이(현충일) 휴회에 들어가기에 앞서 트럼프 행정부의 감세 법안을 통과시킨다는 계획입니다. 감세 법안이 통과할 경우, 미 의회 합동조세위원회(KCT) 추산에 따르면 향후 10년간 연방정부 재정 적자는 2조5000억달러(약 3440조원)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측됐습니다. 무디스 역시 감세 법안이 통과될 경우 향후 10년간 재정적자가 4조달러 늘어날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미 '쌍둥이 적자'에…흔들리는 안전자산 위상
아울러 미 20년물 국채 입찰에서의 부진한 수요 또한 금리 급등을 촉발했습니다. 미 국채 20년물은 10년물과 30년물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수요가 적고 월가의 주목도도 낮지만, 무디스의 신용등급 강등으로 재정건전성 우려가 높아진 상황에서 이뤄진 첫 국채 입찰이라는 점에서 관심이 쏠렸습니다. 미 재무부에 따르면 이날 160억달러 규모의 입찰에서 응찰률은 2.46배로, 직전 6회 평균 응찰률(2.57배)에 다소 못 미친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20년물 입찰에서 수요가 저조했던 것으로 확인되면서 시장에서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미 국채 수요 감소가 이미 현실화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습니다. 불안 심리는 곧바로 달러와 증시 등 미국 자산 전반에 대한 낙폭을 불러왔습니다. 이날 6개국 주요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 지수도 전날보다 0.49포인트 떨어진 99.63에 거래되면서 지난 7일 이후 약 2주만에 다시 100선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미 금융시장의 불안은 곧바로 주요국 금융시장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본 30년물 국채 금리는 사상 최고치를 새로 썼으며, 영국·독일 등의 장기물 국채 금리도 상승세를 보였습니다. 한국 역시 코스피지수가 하락세로 장을 시작했으며, 원·달러 환율도 달러화가 약세를 보이면서 1370원대로 하락 출발했습니다. 환율이 1370원대로 개장한 것은 지난해 11월 6일(1374.0원) 이후 약 6개월 만입니다.
시장에서는 지난 4월 발생한 미국 주식·국채·달러의 동시 투매 현상인 이른바 '셀 아메리카' 공포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이제 더이상 외국인 투자자들이 무역 적자와 재정 적자라는 미국의 쌍둥이 적자를 감수하고 적극적으로 미국 달러와 달러 자산을 투자하던 과거 흐름에서 선을 긋고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까지 나옵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 발표 이후 세계경제 질서의 중심축이 돼 온 달러화 패권 지위와 안전자산으로서 미 국채의 신뢰성에 금이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도이체방크의 외환전략책임자인 조지 사라벨로스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현 가격 수준에서 더는 미국의 쌍둥이 적자에 자금을 대려 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라면서 "달러 약세는 미국 자산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파업과 우리가 오래전부터 경고해 온 미국의 재정 리스크를 보여주는 분명한 신호며 이를 풀 수 있는 것은 연준이 아니라 오직 의회"라고 꼬집었습니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구조적으로 현재 미국 경제가 재정 리스크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감세안 추진 시 재정 지출 감축을 위한 조치들이 병행해서 추진되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제2의 트러스 쇼크가 발생할 위험은 크다"면서 "특히 중국을 포함한 주요 국가 간 관세 협상 지연 혹은 결렬 등으로 물가 불안이 재차 현실화된다면 미국 국채 시장 불안이 예상보다 강하게 확산될 여지가 있고, 지난 4월과 같이 셀 현상이 더욱 심각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미국 공화당 강경파인 칩 로이 하원의원(텍사스)이 21일(현지시간) 워싱턴 D.C.의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규모 감세 계획에 대한 하원 규칙위원회 청문회에서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박진아 기자 toyouja@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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