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부한 발견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GFS 이미지. (사진=GFS 홈페이지 캡처)
[뉴스토마토 임삼진 객원기자] 인간은 어디에서 행복을 느끼며, 어떤 조건 속에서 ‘잘 산다’고 느끼는가? 경제적 풍요가 곧 삶의 만족을 보장해줄까? 부모와의 관계, 종교적 실천, 어린 시절의 기억은 성인이 된 후 삶에 어떤 흔적을 남길까? 이처럼 인간 삶의 ‘번영(flourishing)’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과학적으로 탐색한 사상 최대 규모의 연구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지난 4월30일 학술지 <네이처 정신건강>(Nature Mental Health)에는 글로벌 번영 연구(Global Flourishing Study, GFS)의 초기 결과를 공개했습니다. 이 연구는 하버드대와 베일러대, 갤럽, 오픈사이언스센터 등이 협력하여 지난 2022년부터 22개국에서 지리적·문화적 다양성을 갖춘 약 20만명의 대표 표본을 대상으로 시작한 장기 패널조사입니다. 연구는 총 5년 동안 동일한 집단을 추적하며, 해마다 수집되는 데이터를 통해 번영의 패턴과 그 결정 요인을 추적하는 종단적 연구 방식으로 설계됐습니다.
이 패널에는 아르헨티나, 호주, 브라질, 중국(홍콩), 이집트, 독일, 인도, 인도네시아, 이스라엘, 일본, 케냐, 멕시코, 나이지리아, 필리핀, 폴란드, 터키, 남아프리카공화국, 스페인, 스웨덴, 탄자니아, 영국, 미국 출신의 개인들이 참여했습니다. 이 국가들은 갤럽과의 협의를 통해 세계 인구의 대표성을 극대화하고 지리적, 문화적, 종교적 다양성을 보장하며, 기존 데이터 수집 인프라와 실행 가능성을 고려해 선정되었습니다. 한국은 조사 대상 국가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번영의 여섯 가지 축…행복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GFS는 ‘번영’을 단순한 행복이나 경제적 성취로 보지 않습니다. 연구진은 이를 ▲삶의 만족 및 긍정 감정 ▲신체 및 정신 건강 ▲의미와 목적 ▲성격과 도덕성 ▲가까운 사회적 관계 ▲재정적·물질적 안정성 등 여섯 가지 축으로 정의하고, 12개의 핵심 문항과 100여개 보조 문항을 통해 이를 측정했습니다. 여기에 어린 시절 경험, 종교 활동, 교육, 지역사회 소속감 등 삶의 조건 전반에 대한 질문도 포함되어, 인간 삶의 복합적 구조를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는 틀을 갖췄습니다. 설문조사에는 복지 관련 질문을 비롯해 인구통계학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성격, 아동기, 커뮤니티, 건강 및 성격 기반 질문이 포함되었습니다.
“GDP가 높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예상 뒤엎은 결과
GFS가 발표한 분석 결과는 기존의 ‘행복 선진국’ 담론을 뒤흔들었습니다. 종합 번영 지수가 가장 높은 국가는 인도네시아, 이스라엘, 필리핀, 멕시코 등이었으며, 일반적으로 복지국가로 분류되는 영국, 일본, 터키는 하위권에 머물렀습니다. 이 결과는 '세계 행복 보고서'(World Happiness Report)와 크게 대비됩니다. 그 보고서에서는 북유럽 국가들이 상위권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국은 일반적으로 상위 25%에 포함됩니다. 이번에 발표된 논문의 제1저자인 하버드대 타일러 밴더윌(Tyler J. VanderWeele) 교수는 이 격차에 대해 “재정적 안정성과 삶의 평가와 같은 지표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부유한 국가들이 관계성과 삶의 의미 부문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삶의 의미에 대한 점수는 국내총생산(GDP)이 높은 국가일수록 낮은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GDP와 인간 번영 간에는 단순한 상관관계만 있을 뿐 인과적 연계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청년 세대, 전 세계적으로 ‘번영의 위기’
GFS의 또 다른 충격적 발견은 바로 청년 세대의 번영 지수 하락입니다. 전통적으로 행복은 U자형 곡선을 그려 중년층이 가장 낮고, 청년층과 고령층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조사에서는 18~29세 청년층의 점수가 중년은 물론 80세 이상 고령층보다도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같은 현상은 영국, 미국, 일본, 독일 등 서구 및 아시아 국가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관찰됐습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학업 중단, 봉쇄와 사회적 고립, 불안정한 고용 등 의 복합적 스트레스가 청년층의 ‘심리적 번영’에 구조적인 타격을 주어 주관적 웰빙을 위협했다고 분석합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번영을 결정한다
이번 연구의 가장 주목할 만한 점 중 하나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성인기의 번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모와의 안정적인 관계, 아동기 건강 상태, 정서적 지지 등은 성인이 된 이후 번영 점수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고, 반대로 학대 경험이나 외로움은 부정적인 상관관계를 보였습니다. 이는 웰빙이 현재의 소득이나 건강 상태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개인의 삶 전체에 걸쳐 축적된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종교와 번영의 관계…“상관은 있지만 인과는 아직”
종교적 실천과 번영 사이의 관계도 흥미로운 결과를 보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정기적으로 종교 활동에 참여한 개인은 성인기에 더 높은 번영 수준을 보이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는 사회적 지지와 삶의 목적감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됩니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이스라엘 등 종교적 실천율이 높은 국가들이 번영 순위 상위권에 있는 점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종교적 실천이 심리적·사회적 자원을 제공하며 번영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만 연구진은 “이는 인과관계라기보다는 상관관계 수준”이라고 선을 그었으며, 향후 연구를 통해 종교가 사회적 지지와 목적감을 형성하는 메커니즘을 구체화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데이터…세계 시민과 함께 만드는 복지 지표
GFS의 또 다른 특징은 ‘열린 과학’을 지향한다는 점입니다. 이들 연구 데이터는 매년 수집 후 1년이 지나면 누구나 접근 가능한 오픈 액세스로 공개됩니다. 학자뿐 아니라 정책입안자, 언론인, 시민단체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이를 활용할 수 있어, 복지 지표의 민주화와 실질적 활용 가능성을 크게 높이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인간 번영의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첫걸음
요크대학교 케이트 피켓(Kate Pickett) 교수는 가디언(Guardian)과의 인터뷰에서 일부 연구 결과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밝힙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주관적인 행복감 측정치가 국가의 건강 상태를 객관적으로 반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22개국 중 최하위를 기록한 일본은 다른 국가보다 기대수명이 더 길고 영아 사망률이 더 낮았다고 그녀는 설명했습니다. 그녀는 특히 청년 세대의 위기감과 관련하여 “조사 전 2년간 젊은 세대는 락다운, 불안, 교육 및 훈련 중단, 사회적 관계 단절 등 팬데믹의 부정적 영향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는 노인층보다 더 중요한 시기에 발생했으며, 그들의 번영에 미치는 장기적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GFS 연구는 단순한 국제 비교 지표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인간 번영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려는 실험이며, 각국 사회의 정책 설계와 철학적 기반에 실질적 영향을 줄 수 있는 데이터 기반 도구입니다. 공동 연구자인 미국 베일러대(Baylor University) 바이런 존슨(Byron R. Johnson) 교수는 “우리의 목적은 단순히 순위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 개선하는 데 있다”라며, 향후 더 많은 국가와 문화를 포함해 번영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조망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번 GFS 조사에 한국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 결과는 한국 사회에도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청년 세대의 ‘삶의 질’ 저하, 종교 및 공동체 해체, 개인주의적 가치 확산에 따른 외로움과 무의미감 증대는 한국도 겪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각 개인에게는 단순한 성공이나 소득 이상의 ‘좋은 삶’의 기준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경제성장률이나 고용 지표 중심의 정책을 넘어, 관계적·정서적 복지를 아우르는 ‘총체적 번영’ 지표를 도입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됩니다. 특히 공공 정책 차원에서는 세대 간 격차 해소, 정신건강 서비스 강화, 의미 있는 사회적 연결을 촉진하는 공동체 기반 프로그램의 설계가 절실하다는 것을 GFS 연구는 우리의 과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kosns.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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