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임세웅 기자] 군사정권 시절 군대에 강제 징집해 프락치(신분을 속이고 활동하는 정보원) 활동을 강요받은 '강제징집·녹화사업' 피해자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부 승소했습니다.
서울중앙지법 사진.(사진=뉴시스)
23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0부(재판장 이세라)는 지난 20일 강제징집·녹화사업 피해자 H(62)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2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국가가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습니다.
강제징집·녹화사업은 군사정부에서 행해진 대규모 인권침해 사건입니다. '반란 수괴' 전두환씨는 학생운동에 참여한 대학생을 신체검사 결과와 관계없이 군대로 강제징집했습니다. 전두환정권은 이들을 빨갱이로 규정하고 의식을 푸르게 한다는 의미의 ‘녹화사업’을 진행했습니다. 피해자들은 고문을 받거나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았습니다. 군 전역 이후에도 당국으로부터 사찰을 받기도 했습니다.
H씨는 81년 신체검사에서 시력 저하로 보충역을 받았음에도 현역병으로 배치됐습니다. 이후 17일간 소속 부대와 보안부대로부터 폭행과 고문, 감시와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았습니다. 전역 후에도 보안대 수사관들이 어머니와 형을 방문해 동향을 묻는 등 사찰을 당했습니다.
이에 H씨는 지난 2월6일 대한민국 정부(법무부)를 상대로 위자료 2억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아울러 H씨는 "대한민국은 H씨를 체포해 강제로 징집하고, 군 복무 중 폭행과 프락치 활동을 강요한 것이 인권과 기본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위법행위임을 인정하고 H씨에게 사과한다"는 사과문을 공고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재판부는 H씨가 국가로부터 폭력을 당했다고 인정하며 국가가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습니다. 다만, 사과문 공고 요구에 대해서는 "과거사정리법은 국가에 대해 진실규명사건 피해자 등의 피해 및 명예회복을 위한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의무를 규정한 것이기에, 피고에게 사과문 공고라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의무가 발생한다고 볼 수는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번 판결로 '강제징집·녹화사업' 피해자들의 위자료 책정 기준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피해자들은 크게 △강제징집 △고문과 프락치 활동 등 '녹화사업'의 정도 △제대 후 당국의 감시 및 사찰을 겪는데, 피해자들이 어떤 점까지 겪었는가에 따라 금액대가 정해지는 흐름이 있습니다.
법조계는 강제 징집만 당한 경우 3000만~5000만원, '녹화사업'을 겪은 경우 7000만~9000만원, 제대 후 당국의 감시와 사찰을 받은 경우 1억원 정도로 책정하는 경향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1억원은 선례에 비춰 보면 1억1000만원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금액입니다.
H씨를 대리한 이형범 법무법인 이산 변호사는 "지난 5월22일 녹화사업 피해자 22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판결을 살펴보면 그렇다"며 "H씨는 녹화 사업 과정에서 고문과 폭행까지 받아 1억원으로 인정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피해자들을 모아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진행 중인 이영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변호사는 "판사마다 다르지만, 가혹행위를 2천만원 정도로 인정하는 흐름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H씨는 판결 후 "사상과 양심의 왜곡을 강요당했다. 이번 판결과 그에 따른 보상비는 과거와의 화해비용이며, 과거가 현재를 도운 판결"이라며 "손해배상금은 '우리아이재단'에 기부를 해서 현재가 미래를 돕는 일에 보태겠다"고 했습니다.
이번 판결에 대해 법무부는 항소하지 않을 전망입니다. 법무부는 지난해 12월14일 보도자료를 통해 "소위 '프락치 강요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 배상책임을 인정한 판결에 대해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며 피해자들의 신속한 피해 회복을 위해 항소를 포기한다"며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대한민국을 대표해 피해자분들께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습니다. 이후 모든 강제징집·녹화사업 판결에 항소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따르면 녹화공작 관련자는 2900명에 달합니다. 민변에서는 현재 피해자 150여명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다만 법원이 원고의 과거 피해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가해자인 국가가 사과문을 공고하게 해달라고 요구한 것에 대해 "구체적 의무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은 건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강제징집·녹화·선도공작 진상규명위원회 등 과거사 단체들은 지난달 27일 집회를 열어 “국가 책임은 위자료 단돈 몇 푼으로 끝나지 않는다”며 사과 등 국가의 권고사항 이행 의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촉구하는 1722명의 탄원서를 제출한 바 있습니다.
임세웅 기자 swim@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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