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 선임기자·박혜정 인턴기자] 반도체도 태양광, 배터리 전철을 밟을 위기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중국 메모리 수출 비중이 9월까지 최근 5년간 감소세를 보였습니다. 경기부진 영향도 있지만 중국의 대세계 메모리 수입 감소세가 뚜렷해 자급력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최근 중국 로컬 기업들의 레거시(범용) 메모리 자급화 이슈가 부상했는데 수치로도 확인되는 현상입니다. 전문가들은 삼성과 SK가 중국을 따돌리기 위해 미국이 견제하는 공급망 지형을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삼성보다 K반도체의 위기
23일 관세청 등에 따르면 한국의 대중국 메모리 수출이 부진합니다. 지난 9월 D램과 낸드플래시 합산 메모리의 대중국 수출액은 16억6840만달러를 기록했습니다. 전년 동월 13억3376만달러에서 증가했지만 메모리 시황 반등에 따른 결과일 뿐 물량으로 보면 감소한 것으로 보입니다. 중량 기준으로 대세계 메모리 수출은 올 9월 162톤으로, 전년 동월 214.9톤에서 줄었습니다. 이는 2020년 9월 222.5톤부터 5년 중 가장 낮은 수치입니다. 중국 별도 중량 수치는 확인되지 않지만 대세계 수출금액 추이와 유사한 흐름과 중국의 높은 비중을 고려할 때 대중국 중량 기준 메모리 수출도 감소해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국의 대세계 메모리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도 올 9월 66.3%로 전년 동월 70.5%보다 축소됐습니다. 2020년 9월 78.3%에서 비중이 줄었다가 작년엔 반등했지만 올해 다시 꺾인 흐름입니다. 역시 5년 내 비중을 비교해봐도 올 9월이 바닥입니다.
메모리 중 D램과 낸드플래시 모두 레거시 제품에서 중국 로컬기업의 성장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D램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올 9월 62.5%로 5년내 가장 낮은 저점입니다. 2020년 9월 75.3% 이후 60%대로 떨어져 반등 없이 약세만 이어갔습니다. 낸드플래시는 2020년 9월 87.3% 이후 70%대로 떨어져 2023년 9월에 80%대(83.4%)를 반짝 회복했다가 올 9월 다시 77.8%로 하락했습니다. D램보단 선방하는 편이나 대체로 하락선을 그립니다. D램과 낸드플래시 모두 중량으로 보면 감소세가 더 뚜렷합니다. 시황에 따라 오르내리는 수출금액과 달리 꾸준한 중량 감소는 중국 내 한국산 대체물량이 늘어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실제 중국의 대세계 메모리 수입액은 2023년 788억달러로 전년 1012억달러서 급감했는데 수요감소와 자급력 향상 두가지 요인 모두 작용했을 것으로 풀이됩니다. 코로나19가 극심했던 2020년에도 전년(1195억달러)보다 감소한 952억달러를 기록한 바 있습니다. 작년엔 그보다 수치가 급감했는데, 이를 고려하면 경기보다 자급력 요인이 더 커진 것으로 분석됩니다.
실적 사과문 발표 후 삼성에 대한 위기설이 커졌는데, 이같은 수치는 한국 반도체의 위기로 해석되는 대목입니다. 삼성의 경우 중국 추격에 HBM(고대역폭)까지 뒤처져 샌드위치 형국입니다. 엔비디아향 2차 공급사 자리도 마이크론에게 내줬습니다. 상대적으로 SK하이닉스는 수혜가 부각되지만 중국의 자급화는 공통분모입니다. 과거 태양광 사례에선 한국이 핵심소재인 폴리실리콘에서 앞서가다 중국의 물량공세에 밀려 지금은 거의 퇴출됐습니다. 전기차 배터리도 처음엔 한국이 앞서가다 중국 내 로컬기업 배터리만 쓰도록 현지 당국이 유도한 이후 지금은 세계 1위를 중국(CATL)에 내주고 있습니다.
중국의 레거시 반도체 굴기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중국의 주요 D램 제조업체인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가 증설 투자를 늘리고 있어 시장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반도체 웨이퍼를 기준으로 세계에서 중국 기업들이 차지하는 D램 생산능력 비중이 2022년 4%였지만 올해 11%까지 급증했다고 전했습니다. 모건 스탠리는 이 비중이 내년 말까지 16%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중국의 낸드플래시 제조사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스(YMTC)는 2022년 세계 최초로 232단 낸드 양산에 들어갔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신빙성에 의문은 있지만 낸드플래시 기술 격차가 좁혀지고 있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엔비디아향 HBM 공급이 늦어지는 문제는 AI 거품론과 맞물린 업황사이클 이슈입니다. 업황사이클은 주기적으로 등락을 반복하기 때문에 단기적인 이슈로도 받아들여집니다. 반면 구조적 불황은 석유화학 대중국 수출이 사양화되는 것처럼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입니다.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의 최근 분기 실적 부진도 중국 매출 비중이 20%까지 급감(직전 분기 49%)한 구조적 불황에 기인합니다. 중국 자급화 문제와 성격이 다르지만 미국 견제 요인도 쉽게 바뀌지 않을 요인입니다.
이런 상황에선 흔히 후발주자를 떨쳐내기 위한 치킨게임이 벌어집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국의 중국 견제가 ASML에 파장을 미치는 형국인데, 그러면 중국 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공장도 증설이나 공정개발이 어려운 한계에 직면한다”며 “어차피 중국을 따돌리려면 치킨게임식 경쟁이 불가피한데, 중국에 수출하려고 삼성과 SK간에 경쟁할 게 아니라 로컬과 경쟁해야 한다. 그러자면 중국 현지화 전략도 보수적으로 견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산업연구원은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통제에 따른 중국의 공급망 영향과 시사점’ 보고서에서 “미국 제재로 선단 공정기술 도입이 어려워지면서 중국은 레거시 반도체를 중심으로 집중적인 투자와 생태계 육성이 이뤄질 것”이라며 “미국이 향후 중국 레거시 반도체 조달에 대한 제재를 개시하더라도 중국 레거시 반도체산업의 성장을 좌절시키기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레거시 공정에서의 중국 기술자립과 메모리 등 우리와 경합하는 분야에서 중국의 기술 추격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대중국 수출통제 및 기술제재를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공급망 리스크 등의 대응전략뿐만 아니라 공급망 재편을 활용해 우리기업의 이익과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2014년 5월 9일(현지시각) 중국 산시성 시안시 삼성전자 메모리 반도체 공장 신규라인에서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재영 선임기자·박혜정 인턴기자 leealiv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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