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한동인 기자] 광복 이후 현재까지 80년 가까이 풀리지 않은 '미군정 57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피해자들의 요구에 주목해야 합니다. 핵심은 미군정의 '강제예입'에 있는데요. 강제예입금 총액과 예금주 명세, 강제예입 동기, 예입금 일부 보상 경위, 예입금의 행방 등이 미군정 57호 피해자들의 한을 풀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1951년 11월 15일 <자유신문>에 보도된 '예탁 일화 5억원, 시급 변제를 국회 건의'라는 제목의 보도 내용. 해당 보도에서 권태욱 의원은 미군정 57호 피해 금액에 대한 보상을 국회 결의안으로 제안했다. (사진=국사편찬위원회 '한국 현대 사료 DB'의 1951년 11월 15일자 <자유신문> 갈무리)
총 피해액 당시 기준 '5억 3710만원'
21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미군정 57호 피해자 협회'는 지난 2005년 정부에 5가지 진실 규명을 촉구했습니다. 미군정 57호에 의한 강제예입금 총액을 비롯해 △전체 예금주의 명세 △미 군정청이 한국인 보유 일본은행권을 강제예입케 한 동기 △예입금을 일본으로부터 받아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상환한 경위 △보상을 받지 못한 피해자들의 예입금 행방 등입니다.
1946년 2월 21일 미군정이 일본은행권을 7개 지정 은행에 예입하도록 강제하고도 제대로 된 보상을 하지 않은 지 80년이 다 돼가지만 우리 정부는 피해자들의 5가지 요구에 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 기록된 미군정 57호 관련 흔적을 찾은 결과, 곳곳에서 몇 가지 실마리가 확인됩니다.
1951년 11월 12일 제2대 국회 제93차 본회의 회의록을 보면 권태욱(무소속·재선) 의원이 '과도정부(미군정) 시 외화예탁금 변제에 관한 건의안'을 제출합니다. 권 의원에 따르면 광복 직후 해외에서 귀국한 재외동포는 약 300여만명으로 이들이 가지고 들어온 외화는 50억~60억원으로 추산됩니다.
하지만 미군정 57호를 통해 일본·대만은행권의 강제 예입이 명령되면서 거액의 외화가 도피됐고, 5억 3710만 4116원이 7개 지정 은행에 예입됐습니다. 미군정 57호에 따른 총 피해 금액이 확인된 겁니다.
이와 관련해 권 의원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음에도 "하등의 시정을 청구함이 없이 방임하여 온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정부는 국민에게 신뢰감을 갖게 하고 국민의 복리를 위한 시책을 강구하며 국민의 소유권과 재산침해를 주지 않은 정부가 되어야 할 것이며, 조속한 기일 내로 변제가 있기를 건의한다"고 촉구했습니다. 해당 결의안은 재석 의원 97명 중 찬성 73표에 반대없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다만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전체 예금주의 명세'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대신 1967년 1월 7일 <부산일보> 보도에 미군정 57호 피해자가 약 10만명에 육박할 것이라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재외동포 300만명이 광복직후 들여 온 외화가 50억~60억원 수준인데, 10분의 1인 5억원이 미군정에 의해 예입된 걸 고려하면 피해자는 최대 30만명에 달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한국은행이 지난 1994년 발간한 <한국의 화폐>에 따르면 미군정 57호 발효일인 1946년 2월 21일부로 일본은행권과 대만은행권이 유통되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우리 역사넷' 홈페이지 갈무리)
명목은 '화폐 개혁'…예입금은 '실종'
1946년 미군정이 한국인 보유 일본은행권을 강제예입하도록 한 동기에 대한 기록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미군정 57호 피해자들이 미군정의 사유재산 강탈과 관련해 제기한 헌법소원에 대해 2017년 헌법재판소는 '화폐질서 형성 목적'이라며 '주권적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결했습니다.
실제로 미군정의 포고 제3호 1항에는 '점령군이 발행한 보조 군표인 원 통화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지역에서 공사의 변제에 사용하는 법화로 지정한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특히 3항에는 '기타의 통화는 북위 38도 이남의 지역에서 법화로 인정하지 아니한다'고 돼 있습니다.
당시 일본은행권은 조선은행권과 1대1로 교환되는 화폐로 광복 전에 유통됐는데, 미군정이 법화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겁니다.
이는 한국은행이 지난 1994년 발행한 <한국의 화폐>에 명시된 내용으로 미군정 57호에 대해 "일제의 패망과 국권의 교체라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복잡했던 유통 화폐는 조선은행권으로 통일되고 여러 종류의 화폐 이용에 따른 혼란이 도리어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즉 광복 이후 국내 통화의 안정을 위해 화폐 개혁에 나선 건데 '광복 직후 화폐 종류별 법화로서의 유효기간'을 보면 일본은행권과 대만은행권은 미군정 57호 발효 당일인 1946년 2월 21일 명맥이 끊긴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화폐 개혁을 위해 강제 예입된 미군정 57호 피해자들의 재산에 대해 제대로 된 보상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1975년 7월 1일부터 1977년 6월 30일까지 박정희정부가 '대일 청구권 자금' 명목으로 미군정 57호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에 나선 바 있긴 하지만, 일본에 의한 피해가 아닌 예입금을 왜 청구권 자금으로 보상하게 됐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또 당시 청구권 피해 신고 14만 2820건에 대한 보상액은 총 91억 8769만원인데, 이는 박정희정부가 한·일 청구권으로 받은 금액의 5%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청구권 피해 신고 14만건에는 미군정 57호 피해자들과 함께 일본으로부터 피해를 받은 국민들이 섞여 있던 만큼 그 보상 금액은 터무니없습니다.
게다가 총 피해 금액이 1946년 기준 5억원인데, 당시 조선은행권 현존량 69억 7200만원(1945년 <매일신보>·조선학술원 연구보고서 기록)의 13%에 달하는 점을 고려하면 예입금 대부분이 행방을 알 수 없이 사라진 셈입니다.
한동인 기자 bbha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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