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 얘기는 좀 부담스러운데?”
“그랬구나! 이제야 너를 잘 알겠어.”
같은 얘기를 들은 두 사람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다. 한 사람은 부담을 느끼며 나와 거리를 두고 싶어 했고, 또 한 사람은 비로소 나에 대해 정확히 알았다면서 내가 자신에게 비밀을 털어놔준 것을 고마워했다. 두 사람은 평소 내가 무척 신뢰하던 이들이었는데 전자는 그 이후로 당연히 멀어졌고 후자는 더 친밀해졌다. 전자의 반응은 내게 오랫동안 상처가 됐지만 그 덕에 나는 확실히 알게 됐다. 타인의 비밀을 안다는 것의 무게를 말이다.
“이건 앙트레 누(entre nous)야!”
‘우리끼리의 이야기’, 즉 둘만 아는 비밀얘기란 뜻의 불어 ‘앙트레 누’. 영화 <바튼 아카데미>에서 까칠한 스승 폴과 반항아 제자인 털리는 함께 있는 2주 동안 이 ‘앙트레 누’를 여러 번 외쳤다. 크리스마스 방학을 맞아 바삐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 틈에서 돌아갈 곳이 없거나 함께 할 사람이 없어서 학교에 남아야 했던 그들. 한 공간에 있지만 외떨어진 두 섬으로 존재하며 서로 으르렁대기 바빴던 그들이 만날 수 있었던 건 바다 아래에서 거대하게 일어난 지진 때문이었다. 지진은 단층을 서로 붙게도 떨어뜨리게도 하는데 다행히 이 두 섬은 서로를 이끄는 쪽으로 움직였다. 폴과 털리 모두 내가 만난 후자와 같은 사람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제2의 <굿 윌 헌팅>쯤으로 해석하는 것에 나는 반대한다. 어른이 아이를, 스승이 제자를 키워낸다는 일방적이고도 편향된 시선을 극복해야 이 둘의 진정한 관계가 보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가 특별한 것은 폴과 털리의 눈높이가 그리 다르지 않아서이다. 사실상 폴은 나이 많은 털리였을 따름이다. 똑같이 자기만의 성을 쌓고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공격을 최선의 무기로 삼은 그 둘은 나이만 차이 나는 쌍둥이 같았다. 하여 ‘앙트레 누’는 털리의 입뿐만 아니라 폴의 입에서도 똑같이 내뱉어질 수밖에 없는 구호였다. 물론 희생의 몫은 결국 폴이었으나 그가 그것을 감당해 내는 진짜 어른이 된 것은 오로지 털리 덕이었다. 그들은 서로가 스승이었고 서로가 제자였으며 서로를 통해 배우고 키워졌다. 진정한 교학상장(敎學相長)의 모습.
그들의 교학상장이 아름답다고 하여 모든 스승과 제자의 모습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의대 교수들과 제자들의 모습처럼 말이다. 그 둘의 끈끈한 이해와 연대는 초·중·고와는 달리 대학에 가면 쉽게 소원해지는 사제관계의 측면에서는 매우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모습이겠다. 하지만 작금에 그들의 이해와 연대를 가능케 한 ‘앙트레 누’가 전 국민에게 까발려진 이상 그들의 관계는 아름다움과는 정반대다. 그들의 앙트레 누란 힘들게 얻은 사회적 지위와 명성, 부를 놓지 않겠다는 노블리스 말라드(Noblesse Malade)의 전형으로 집단 이기주의, 딱 그것이다. 너무 통탄스러워 건강하던 국민들도 병이 나 앓을 판이다.
당장의 조직적 움직임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그 자체로 자살행위일 수 있음을 잘 안다. 현실에서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실현을 꿈꾸는 것이 욕심이라 해도 속물적 기준을 넘어 소명의식으로 그 어려운 길을 택한 의사들이 많다는 것은 더 잘 안다.
“어디에 시선을 두면 되나요?”
“왼쪽눈. 여길 보면 돼.”
스승의 눈을 정확히 보고 싶어 하는 털리에게 폴은 사시눈인 자신의 왼쪽눈을 가리킨다.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면서도 제자와 진정한 소통을 하려 했던 폴. 우리 의대교수들에게도 이런 용기가 있으리라 믿고 싶다. 의사로서 먼 길을 가야 하는 제자들에게 부디 현실논리에 의해 초심을 잃지 말라고 말할 용기 말이다. 사직서를 내던지는 용기가 아니라.
이승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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