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 기자]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하 전기본) 발표가 늦춰져 기업들도 사업계획 수립에 애를 먹고 있습니다. 이번 전기본에 걸린 산업계의 이해관계가 복잡합니다. 발전소 및 에너지 분야는 물론 국내 유턴투자를 약속한 주요그룹들 사정까지 얽혀 있습니다. 탄소중립 이행 속도를 늦출수록 경제적 이윤이 더 남는 기업들로선 장고하는 정부의 눈치만 살핍니다.
정부 전기본 장고…속타는 기업들
26일 정부 및 산업계 등에 따르면 정부는 국내 반도체, 이차전지, 전기차 등 국내 투자 산업단지에 공급할 전력으로 액화천연가스(LNG)를 우선 확정했습니다. 용인 반도체 특화단지에 2036년까지 LNG로 3GW를 충당한다는 계획입니다. 나머지 7GW 이상은 2037년 이후 서해안 초고압 직류망 등 장거리 송전선로를 통해 호남과 동해안의 발전력을 공급하기로 했습니다.
일단 LNG는 반도체 칩 고객사인 애플, 엔비디아 등이 주도하는 RE100(신재생에너지 100%)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최악의 경우 삼성이나 SK가 애플이나 엔비디아 공급망에서 빠질 위험이 생깁니다. 게다가 남은 발전원도 동해안에서 공급한다는 송전선로 계획만 잡았을 뿐 발전원은 뭔지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해안가는 정부가 부활 기치를 올린 원전이 유리합니다. 그래서 원전 추가가 점쳐지기도 했지만 역시 RE100을 충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정부가 원전을 포함한 CF100(무탄소에너지 100%)을 밀고 있지만 글로벌 합의에 이를지 불확실합니다.
정부의 고민이 길어지면서 마침내 나올 전기본에 관심이 쏠렸지만 총선 뒤로 미뤄지는 분위기입니다. 본래 작년말 초안 발표가 예상됐는데 차일피일 밀렸습니다. 기업은 기다리는 만큼 속이 탑니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신중히 결정할 필요가 있지만 이미 방향을 정해놓고 다른 이유로 발표만 미룬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며 “정책에 따라 사업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기업으로선 손 놓고 기다리는 실정”이라고 토로했습니다.
정부가 원전 부활을 장담했지만 현실이 녹록지 않습니다. CF100 합의는 커녕 원전을 추가하기 위한 부지 확보도 어렵습니다. 게다가 원전에서 만든 전력을 공급할 송전망도 부족합니다. 사용후핵연료(고중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까지 문제가 복잡합니다. 사실상 탄소중립 이행수단이 불확실해 국내 투자를 약속했던 삼성, SK, 현대차 등 산업 전반이 오리무중입니다. 업계는 탄소중립 이행전략에 따라 경제적 부담을 줄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책 발표 전에 미리 사업 방향을 정하기도 어렵습니다.
더욱이 원전 비중을 늘리면 신재생에너지를 늘릴 여력은 감소합니다. 신재생에너지만 100%로 쓰자는 글로벌 이니셔티브(자율규범단체) 약속에서도 멀어지게 됩니다. 이에 따라 글로벌 비즈니스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기업 사정이 그러니 원전 카드를 꺼낸 정부도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이런 난맥상 속에 갈피를 못 잡는 기업들이 많습니다. 전기본이 지연되는 건 단순히 에너지 업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국내 대규모 유턴투자와 결부돼 있습니다. 주요 그룹들이 정부의 친기업, 규제완화 정책에 화답해 유턴투자를 발표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이 투자하는 용인, 평택, 구미 반도체 클러스터가 있습니다. 청주, 포항, 울산, 새만금엔 이차전지, 천안, 아산엔 디스플레이 등 산업 특화단지도 들어섭니다. 정작 공장을 가동할 발전원이 뭔지도 모른 채 덜컥 약속을 잡은 셈입니다.
RE100은 민간합의…CF100 불신감
각국의 정치적 상황은 기업들의 불안감을 키웁니다. 유럽은 수입 제품의 모든 생산 과정에서 탄소배출량을 따져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습니다. RE100 역시 생산 과정에서 신재생에너지 100%를 쓰지 않으면 공급망에서 배제한다는 방침입니다. 이는 국내 신재생에너지 발전원이 부족한 환경에서 정책적 도움 없이 민간 기업만으로 풀기 어려운 과제입니다. 따라서 국내 투자 약속이 공수레란 의심마저 나옵니다. 심지어 전기를 많이 쓰는 반도체는 더 막막합니다. 수도권에 공장을 짓기로 해 RE100은 물론, 공장에 전력을 조달할 수단도 없단 지적입니다. 발전원은 대체로 해안가에 위치합니다. 수도권까지 전력을 끌어오려면 송전망을 새로 설치해야 하는데 민원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석탄발전소를 운영하는 A기업은 LNG발전 전환을 추진하지만 전기본상 제약이 걸립니다. 원전을 키우기 위해 LNG 비중을 늘리기 어렵다보니 인허가가 어렵습니다. 또다른 B기업은 이번 전기본상 화석연료발전소의 운영기간이 단축될 것으로 여깁니다. 투자비용회수가 어렵자 사업 매각을 검토 중인데 전기본 결과를 봐야 확정지을 수 있습니다. 모두 전기본 발표에 좌우되지만 정작 정부는 CCS(탄소포집저장)를 달라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CCS는 비용 추가 부담이 있는 데다 국내 포집한 탄소를 저장할 공간도 부족합니다. CCS에 보조금을 주는 나라는 현재 미국뿐이라 유턴투자도 꺼려집니다.
정부가 하루빨리 방향을 정해줘야 하지만 총선 뒤로 미뤄지는 건 전기본의 이슈화를 꺼린 게 아니냐는 의심마저 존재합니다. 이런 의심은 원전 추가를 위해 전력수요를 부풀렸단 의혹에서부터 비롯됐습니다. 차후 전기본 문제로 책임소지가 생길까 자문집단에 참여하길 교수들이 꺼렸단 소문도 학계에 퍼졌습니다.
RE100은 민간 기업들이 발족한 이니셔티브입니다. 각국의 정치적 상황과 무관합니다. 때문에 CF100에 대한 외교적합의가 이뤄져도 RE100은 해결되지 않는다는 회의론도 있습니다.
박상인 서울대행정대학원 교수는 “RE100은 국가가 아니라 글로벌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라며 “그것 못하면 서플라이체인에서 빠지니 기업들이 RE100 환경을 만들어달라고 정부에 요구해야 하는데 일언반구도 없다. 국내선 더티인더스트리로 수익성만 챙기고 RE100은 해외서만 하겠다는 게 아니냐”고 꼬집었습니다. 기업은 정부 눈치 보지 말고 국내 탄소배출이 많은 산업 자체를 줄이란 지적입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부 정책은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이 가장 중요하다”며 “친환경 정책 관련 신속하고 일관성 있는 결정이 이뤄져야 기업들도 준비할 수 있다. 신속한 결정이 아주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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