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전에 입사해 이제는 지점장급이 된 한 은행원과 식사를 했다. 산전수전을 겪은 그에게 금융위기가 임박한 것 아니냐고 물어봤다. 환율이 1400원을 막 돌파했을 때였다. 그는 "IMF가 터지기 직전까지 관료들은 '한국 경제는 괜찮다'고 안심시켰다. 아무도 믿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절대 회사를 그만두지 말라"는 말로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가 첫 입사한 '친정' 은행은 외환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이듬해 사라졌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는 모습을 목격했을 것이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뜻이리라.
코로나19 대유행이 잦아들면서 일상의 회복에 기쁨을 느끼는 것도 잠시, 전 국민에게 유동성 잔치의 호된 청구서가 날라들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전염병 경보단계중 최고 위험등급인 코로나19 팬데믹을 선언하자 전 세계 중앙은행은 어마어마한 돈을 시장에 쏟아부었다. 0%대 금리인하를 통한 공격적 통화정책과 방대한 규모의 양적완화를 통한 재정정책으로 코로나 위기를 대처했다.
이전의 경험보다 더욱 빠르고 큰 규모로 말이다. 이렇게 시장에 뿌려진 돈은 자산시장의 폭등으로 이어졌다. 시장은 불과 2년 만에 과열되고 이제 시장에는 인플레이션과 버블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
40년 만에 가장 센 인플레이션이 왔다거나 금리인상으로 대출이자는 눈덩이로 불어나고 '영끌족'이 힘들다는 소식이 들린다. '플렉스 소비(과시형 소비)', '파이어족(조기 은퇴족)'이란 단어는 사라진지 오래다.
정부가 야심차게 내놓은 고금리 대책은 언감생심이다. 변동금리 주택담보대출을 최저 연 3.7%의 장기·고정금리 정책모기지로 대환해주는 '안심전환대출'은 수도권 차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수도권 지역의 아파트 중위가격은 6억대에 달하는 데 안심전환대출을 신청할 수 있는 주택가격은 최대 4억원 이하다.
당국과 여론의 압박에 은행들이 대출금리 인상을 자제하고 있지만, 막기엔 역부족이다. 은행권 신용대출 금리 상단이 연 7%를 넘어섰다. 앞으로 대출금리는 더 오를 일만 남았다.
한국은행은 미국의 '자이언트 스텝(기준금리 0.75%p 인상)'에 대응하기 위해 이달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한 번에 0.5%p 올리는 '빅스텝'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주식시장은 저점을 갱신했다는 뉴스로 도배 중이다. 코스피 2200선이 속절 없이 무너지면서 개인투자자들의 패닉셀(공포에 의한 투매)이 급증했다. '데드 캣 바운스(잠깐의 반등)'가 나올 수 있지만, 2000선도 위태롭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정부는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증권시장안정펀드(증안펀드) 재가동 준비에 들어갔다고 하지만, 투자자들이 당장 기댈 곳은 아니다. 코스피 2000선이 무너져야 실제로 작동될지 모르는 '립서비스'를 믿고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원화 가치도 곤두박질쳤다. 올해 초 1100원대였던 원·달러 환율은 최근 1440원을 넘어서며 불과 9개월 만에 30%가 급등했다. 금융 시장을 덮친 경기침체 우려를 감안하면 1500원 마저 돌파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난무한다.
환율안정을 위한 정부의 묘책은 묘연하다. 관료들은 한미 통화스와프를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있지만 미국이 거센 긴축을 이어가는 상황에서 달러를 한국에만 공급할지도 의문이다.
국민들은 코로나19라는 긴 터널 속에서 마스크 쇼티지부터, 백신의 수급 불안, 부작용 우려, 의료체계 마비 등을 겪으며 각자도생해야 했다. 부동산과 주식, 코인 등 자산 가치의 급변화는 불황과 호황을 반복하는 경기순환 속에 불가피한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 스스로가 알아서 살 길을 찾아가야 하는 각자도생의 시나리오를 반복하지 않길 바란다.
이종용 기자 yong@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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