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고작 두 달 정도란다
. 의사의 입에서 나온 ‘두 달
’이란 단어가 눈앞에서 펄럭거리며 떠다녔다
. 영원히 내 옆에 계실 줄 알았던 아버지가 이제 곁을 떠나시는 것이다
.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단다
. 병원에서 퇴원 후 집으로 오셨다
.
며칠 전 정신을 차린 아버지가 “이제 날 잊고 살아라”라고 하신다. 어머니는 깊은 한숨을 쉬셨다. 나는 깊은 한숨을 머금었다. 집에 와 아내에게 아버지 말을 전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아내가 묻는다. “왜 아버님은 자신을 잊으라 하시는 걸까?” 아내는 정말 궁금한 눈치다. 난 아내의 그 말이 서운했다. 아버지가 아닌 내가 이해 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죽음 앞에서 잊히고 싶은 바람. 그건 아버지가 가장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화난 이유, 나 또한 남편이자 아빠이자 가장이기 때문이다. 한평생 어깨를 짓누르던 가장의 무게를 벗고 죽음 앞에서만이라도 편하게 쉬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이 저릿하게 다가왔다.
1937년생 소띠 아버지. 얼마 전 의학적으로 치료 불가능 판정을 받으셨지만 사실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몇 년 전부터 큰 위기를 몇 차례 겪었던 탓에 언제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터였다. 이번엔 진짜 그때가 왔다. 마약성 진통제로 힘겹게 버티던 아버지가 “이제 나도 그만 사라질 시간이다”고 다시 말씀하신다. 이불 밖으로 드러난 아버지 손이 거칠었다. 그 손을 보면서 나는 한번이라도 아버지만큼 치열하게 살아본 적 있는가 되물었다.
아버지 세대 모두가 그렇듯 치열하게 어쩔 땐 처절하게 버티며 현재까지 살아오셨다. 한국전쟁 당시 얘기가 아니다. 1970년대 초반까지도 쌀겨로 끼니를 연명하셨단 얘기, 1980년대 사업이 망해 온 가족이 꽤 긴 시간 동안 삼시세끼 수제비만 먹었던 기억은 몇 년 전까지 술만 드시면 되풀이하시던 레퍼토리다. 고됐던 삶의 순간들을 술에 의지해 회상하셨다.
아버지는 가장이었다. 본인이 힘든 것보다 자신으로 인해 힘들어질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바라보는 게 힘들었을 것이다. 그럴 때면 사라지고 싶기도 했겠지만 아버지는 가장이었기에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아버지의 어깨는 가족 모두가 올라탄 커다란 지게를 늘 힘겹게 짊어지고 있었다. 자식들이 독립하고 할아버지가 됐지만 지게 무게는 줄지 않았다. 막내아들이 낳은 손주가 발달장애인이었다. 나이 들어 걱정 없이 손주들 재롱 보며 살고자 했던 노년의 평화마저도 무참히 깨졌다. 젊을 땐 자식 걱정, 나이 들어선 손주 걱정. 아버지의 삶은 마지막까지도 개인이 아닌 아버지로서 존재하고 있다. 나는 그 사실이 못내 슬프다.
몇 년 전 본 영화 ‘국제시장’. 영화 마지막 즈음 덕수(황정민)가 죽음 직전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정진영) 환상을 보며 “정말 힘들었다”고 버텨온 삶을 회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정말 힘들었다”는 그 말에 내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흘렀다. 이제는 잊히고 싶다는 아버지, 그 말에 담긴 뜻을 존중해드리고 싶다. 이제야말로 한평생을 짓눌린 ‘아버지’란 무게에서 벗어나 온전한 개인으로서 삶의 마지막을 정리하시길 바란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너무 감사드립니다. 너무 사랑합니다. 아버지.”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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