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왕해나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불법 승계' 사건이 법원으로 넘어오면서 과거 법원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내린 판결들이 재조명받고 있다. 법원은 합병무효 소송과 보건복지부 장관이 관여된 형사 소송, 주식매수 가격 결정 소송 등에서 경영권 승계 목적은 인정했지만 합병비율의 불공정성 등은 인정하지 않았다.
불법승계 의혹 등을 받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6월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후 호송차에 탑승해 있다. 사진/뉴시스
8일 법원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16부(재판장 함종식)는 지난 2017년 10월 일성신약 등 삼성물산의 소액주주 5명이 삼성물산을 상대로 합병을 무효로 해달라며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원고들은 합병 목적이 이 부회장 등 그룹 총수일가의 경영권 승계 및 지배권 강화를 위한 것이므로 합병목적이 부당하며 합병비율이 삼성물산과 주주들에게 불리하게 측정돼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이 부회장의 혐의 중 △합병 목적·경과·효과 등 합병 관련 허위정보를 전달하고 주식매수청구를 억제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주가를 관리한 자본시장법을 위반 △주주들의 이익을 보호할 업무상 임무가 있음에도 삼성물산 회사와 주주들에게 불리한 합병을 실행한 업무상 배임을 했다는 검찰 주장과 관련된 부분이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합병이 경영권 승계 목적으로 이뤄진 것이며 이 부회장이 합병계획을 승인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이 부회장이 연루된 박근혜정부의 '국정농단' 사건 판결을 근거로 "이 사건 합병에 대해 대주주의 경영지배권 행사를 지원하는 삼성그룹 내 미래전략실이 관여했고, 이 부회장의 동의·승인 하에 합병이 이뤄진 점을 인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경영상의 합목적성이 있었고, 경영권 승계가 합병의 유일한 목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으며, 특정인의 기업에 대한 지배력 강화가 법적으로 금지돼 있지 않다"고 합병의 불법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삼성이 합병비율을 조작했고 그로 인해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일방적인 피해를 입혔다는 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합병비율이 삼성물산과 주주들에게 불리했는지 의문이고, 불리했다 하더라도 자본시장법상 시세조종행위, 부정거래 행위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는 특별한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주가조작 의혹에 대해서도 "삼성물산이나 제일모직의 시장주가가 대주주 등에 의해 조작되는 등 시장의 기능을 방해하는 부정한 수단에 의해 영향을 받아 정당한 시장가치를 반영하지 못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봤다. 해당 재판은 3년 정도 멈췄으나 10월부터 항소심이 다시 시작된다.
하지만 일부 판결에서는 삼성물산의 대주주인 국민연금이 이익에 반하는 의결권을 행사했다는 점이 인정되기도 했다. 이 부회장이 국민연금 상대로 허위 정보를 제공하고 박 전 대통령의 부당한 영향력 행사를 유도했다는 자본시장법 위반 관련 혐의와 연결돼있다.
서울고법 형사10부(재판장 이재영)는 지난 2017년 11월 국민연금관리공단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하도록 압력을 넣은 혐의로 기소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의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 재판에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했다. 해당 재판은 대법원 상고심으로 올라간 상태다.
2015년 당시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지분 11.2%를 가지고 있어 국민연금이 반대하면 의결정족수 미달(출석한 주주 의결권의 2/3 미달)로 부결될 상황이었다. 재판부는 "(문 전 장관 등이)이 부회장 등 삼성그룹 대주주에게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게 하고 국민연금공단에 캐스팅보트의 적극적 활용을 통해 추가적으로 얻을 수 있었던 이익을 상실함으로 인한 손해를 가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해당 과정에 청와대 개입이 있었던 점도 인정했다. 다만 이 부회장의 부정한 청탁으로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했는지 그 인과관계는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의 '이 사건 합병 안건에 대한 국민연금공단의 의결권행사 문제를 잘 챙겨보라'는 지시가 있음을 인지했던 것으로 보이는 문 전 장관에게 범행의 동기가 없었다고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시 주가가 인위적으로 조작됐을 수 있다는 의문을 제기하는 판결도 있었다. 해당 부분 역시 이 부회장의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와 맞닿아있다.
서울고법 민사35부(재판장 윤종구)는 2016년 일성신약과 소액주주들이 "삼성물산이 합병 때 제시했던 주식매수가격이 너무 낮다"며 낸 주식 매수 가격 결정 신청 2심에서 1심을 깨고 매수가를 올려 정했다. 해당 재판도 4년째 대법원에서 계류 중이다.
재판부는 모든 주주에게 유리한 시장가격이 형성될 수는 없다면서도 "주가가 낮게 형성될수록 총수 일가 이익이 커지고 총수일가가 삼성물산 경영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는 점, 기업집단을 지배하는 동일인에 의한 지배력 행사 행위는 뚜렷한 흔적이 남기 어렵다는 점을 보면 삼성물산의 실적 부진이 총수 일가 등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에 의해 의도됐을 수도 있다는 의심에는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과거 판결들은 이 부회장의 자본시장법 위반, 업무상 배임 혐의와 관련돼 있어 향후 재판에서 검찰 측의 증거로 활용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다만 이 부회장 측은 "경영상 필요에 의해 이뤄진 합법적인 경영활동이고 합병과정에서의 모든 절차는 적법하게 이뤄졌다"면서 "문 전 장관 형사 사건에서 인정한 손해도 국민연금이 캐스팅보트를 행사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추구하지 않은 추상적인 손해"라고 반박하고 있어 치열한 법리 다툼이 예상된다.
과거 재판부 판단에서는 양사 합병의 불법성, 국민연금 등 주요 주주 매수, 주가 조작 등 의혹에 대해 "합리적인 의심이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 "공소사실을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만한 증거가 없다"고 판단한 부분이 다수 존재한다. 검찰이 어느 정도의 직접 증거를 들고 있느냐에 따라 이 부회장에 대한 재판 결과가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왕해나 기자 haena0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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