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강제징용 배상판결이 한·미·일 공조에 미치는 영향
2019-09-02 06:00:00 2019-09-02 06:00:00
전재경 사회자본연구원장
미국을 중심축으로 움직였던 한·일 관계가 장군멍군으로 치닫고 있다.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빼고 한국이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연장을 거부하자 미국 행정부 고위관리들은 연일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일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일제 강점기 일본의 식민지 수탈이 근본 원인이겠으나 가까이는 일제 강제징용에 대한 우리 대법원의 배상판결이 도화선이었다. 먼저 한일협정(1965년)을 보자. 일본은 한국 정부가 향후 일본의 식민 지배와 관련해 더 이상 일본에 배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무상원조 3억달러, 정부 차관 2억달러 및 민간 차관 1억달러를 주기로 약정했다.  차관(빚)을 뺀 무상원조는 3억달러에 불과했다.
 
이후 강제징용 피해를 입은 여 아무개씨 등 4명은 지난 2005년 자신들이 일했던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피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2012년 우리 대법원은 신일철주금에 배상 책임이 있다는 취지로 원심을 깨고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이어서 열린 파기환송심은 대법원 취지대로 "신일철주금이 피해자 4명에게 각각 1억원씩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고, 대법원은 2018년 10월 판결을 확정지었다. 이에 대해 일부 인사들과 언론은 여러 가지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런 반론들은 모두 법리에 맞지 않는다. 쟁점별로 살펴본다.
 
상기 비판론은 "한일협정으로 모든 청구권이 소멸되었는데 우리 대법원이 개인들의 배상청구를 인정함은 잘못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일협정은 국제공법 관계이고 징용기업에 대한 피해자의 배상 청구는 국제사법 관계이므로 서로 상쇄될 수 없다. 당사자 개인의 위탁이 없는 한 정부가 사적 청구권을 대위할 수 없다. 대일 배상청구의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가해자에 대한 배상청구는 한국전쟁, 한일협정, 정부의 비협조, 가해기업의 합병, 국제적 교섭의 곤란성 등 시효완성이 진행될 수 없었다. 독일은 의회결의(1969년)로 나치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없앴다. 반대파는 대법원이 보충적 법리인 신의성실로 시효를 부정했다고 비판하지만, 민법상 신의성실(제2조)은 보충적 원리가 아니라 로마법 이래 사법 최고의 원칙이다.
 
반대파는 가해기업인 일본제철이 이미 합병으로 소멸되었기 때문에 피해 당사자가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업법 원리에 따르면, 흡수 합병된 일본제철과 이를 합병한 신일철주금은 동일체이다. 후자는 전자의 책임을 승계한다. 반대파는 나아가 "일본이 자국 의회를 거쳐 제정한 법률을 우리의 공서양속에 반한다고 판단함은 지극히 이례적"이라고 말하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한국의 공서양속과 일본 판결의 기판력을 인정할 것인가의 여부는 한국 법원이 판단한다. 한국 법원은 일본 법원의 기판력을 배척할 수 있다.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은 그 성질이 명백히 피해자의 적절한 배상을 위한 것이 아닌 때에는 이를 인정하지 아니한다(국제사법 제32조 제4항). 대법원의 배상명령이 피해자에 대한 특혜라는 반론도 나오고, 앞으로 같은 소송들이 속출할 것이라고 걱정도 있지만 기우다. 개인배상은 국가배상과 중첩되지 않으므로 특혜가 아니다. 집단소송이 보편화된 마당에 법원이 소송의 폭주를 우려할 일도 아니다.
 
일부 언론(2019.7.31.)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법원이 전쟁포로수용소 피해자였던 미군 병사가 일본 회사를 상대로 낸 소송을 기각하면서 "원고가 받아야 할 충분한 보상은 앞으로 올 평화와 교환되었다"고 판시한 사례를 근거로 "일제 징용으로 피해를 입은 한국인들도 가해자 일본의 기업들에게 배상청구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미국은 아시아·태평양에서 일본의 협력을 받아 중국과 러시아, 북한과 패권을 겨루는 입장이다. 캘리포니아 주법원은 법학에 기초했다기보다 문학에 입각해 미·일 양국의 협력과 평화라는 추상적 이념을 위해 병사 개인의 구체적 법익을 희생시켰다.
 
신일철주금에 대한 피해자들의 배상청구를 인정한 우리 대법원의 판결은 민법, 기업법, 국제공법 및 국제사법의 모든 법리에 부합한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가 국제적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지만 식민지 수탈, 위안부 징발 및 강제징용에 대한 헐값의 국가배상 시비는 차치하고라도 한일협정에는 한국 정부가 '사인 대 사인'의 배상청구까지 대위한다는 약정이 없다. 우리 대법원 판결을 비판하는 국내외 반대론자들이 일본 정부의 입장을 계속 두둔할 경우 한·일 공조는 멀어진다. 이러한 상황은 한·미·일 동맹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전재경 사회자본연구원장(doctorchun@naver.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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