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진양 기자] 일본의 반도체 소재·부품 수출 제한 조치로 국내 반일 감정이 높아지면서 일본 제품 불매 운동도 거세게 일고 있다. 많은 일본 제품들이 소비자의 외면을 받고 있는 가운데, 국내 필기구의 자존심 모나미는 반사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지난 8일 기준 모나미 공식 온라인몰의 문구류 매출은 전주 대비 5배 이상 급증했고, 신규회원 가입자 수도 60% 가까이 증가했다. '나만의 잉크'를 만들 수 있는 체험 공간 '모나미 잉크랩'의 체험 예약 건수 역시 13배가량 늘었다.
모나미는 일본 경쟁사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기술력을 앞세워 이 같은 인기를 지속시켜 나가겠다는 각오다. 그 선봉에는 경기도 용인시 모나미 본사 2층에 자리잡고 있는 '모나미 연구소'가 있다. 지난 1988년 설립된 모나미 연구소에는 현재 12명의 연구원이 재직 중이다. 모나미는 연간 매출의 1%에 가까운 비용을 연구개발(R&D)에 투자할 만큼 기술력 향상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모나미 본사 사옥 모습. 사진/모나미
"아빠의 마음을 담아 환경이나 인체에 무해한 안전한 필기구를 만들고 싶습니다. 색을 다루는 직업인 만큼 아빠만이 만들 수 있는 색상을 선물하고도 싶고요"
올해로 13년째 모나미에서 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이훈욱 과장의 꿈은 소박했다. 수시로 손에 잡은 것을 입으로 가져가는 아이를 보며 보다 안전한 제품 개발을 다짐하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에게는 보다 다양한 색을 접하게 해주고 싶다는 평범한 아빠들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크레파스 제품 연구 중 예정에 없던 색상이 나왔을 때 비닐봉지째로 아이에게 가져다 줬다는 점 정도가 다른 아빠와의 차이였다.
이훈욱 모나미연구소 연구원. 사진/모나미
이 연구원은 현재 모나미 연구소에서 필기구 중에서는 유성 볼펜과 보드마커, 회화구 중에서는 크레파스, 색연필 등에 들어가는 잉크를 주로 연구한다. 당장 제품화에 적용되기 보다는 미래의 제품에 사용될 잉크 개발과 그에 적용할 수 있는 신규 소재 발굴이 그의 주 업무다. 이 연구원은 "생각하는 부분을 만들어가고, 그게 제품으로 구체화 된 다는게 재미있고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자신의 일을 소개했다.
그의 애정이 듬뿍 담긴 제품은 지난 2010년 출시돼 지금까지 꾸준한 인기를 이어가고 있는 'FX제타'(이하 제타)다. 제타는 최근 일본 제품 불매운동 특수를 누리고 있는 모나미의 인기를 뒷받침하는 주역이기도 하다. 일본 유니사의 '제트스트림'과 비슷한 외관으로 경쟁작으로 많이 언급되는데, 필기감 등 기능적 측면에서 일본 제품에 크게 뒤지지 않아 호평이 이어지고 있는 제품이다. 가격도 저렴해 대체재로 훌륭하다는 평이 많다.
모나미 FX제타(위)와 일본 유니사의 제트스트림(아래). 사진/김진양 기자
제타는 모나미의 다른 제품들보다 개발 기간이 더 길었던 제품이다. 보통 기획에서 개발까지 1년 내외의 시간이 걸리는 데 반해 제타는 연구에서 최종 제품 출시까지 총 3년의 시간이 소요됐다.
첫 걸음은 새로운 잉크의 개발에서 시작됐다. 제타는 모나미의 5세대 잉크(F5)가 적용된 제품이다. 모나미의 대표 제품인 '153볼펜'에 적용된 1세대 잉크(F1)부터 제타에 사용된 잉크까지 모나미는 모두 자체 개발을 통해 완성했다. 유성과 수성을 오가며 여러 시행착오를 수정·보완하며 지금의 잉크를 완성해 낸 것. 특히 과거에는 일본에서 어떤 제품이 나오면 이를 보고 따라가기 급급했는데, 5세대 잉크는 개발과 출시 시점이 경쟁사와 거의 비슷하다. 이 연구원은 "5세대 잉크는 어떻게 해야 잉크를 더 향상시킬 수 있을지,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할 지를 모두 정하고 나온 제품"이라며 "기술력이 과거에 비해 확실히 많이 개선됐다"고 자신했다.
5세대 잉크는 기존 잉크 대비 점도를 10배 이상 낮춰 필기면체와의 마찰 저항을 최소화한 점이 특징이다. 소위 '볼펜똥'이라 불리는 찌꺼기를 최대한 줄이는 동시에 부드러운 필기감과 선명한 색상을 구현해 냈다. 이 같은 결과를 얻기까지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잉크의 점도를 낮추다보니 잉크 유출이 보다 쉽게 일어났던 것. 이 연구원은 "153볼펜의 경우 점도가 높아 볼펜 끝을 아래쪽으로 놓아도 새는 부분이 적었지만 점도를 낮추니 문제가 계속 발생했다"며 "팁(펜촉) 안에 스프링을 넣는다든지, 팁을 가공해서 밀폐성을 좋게 한다든지 등 구조적으로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그는 "1차적으로 점도가 10배 낮은 잉크를 개발하자는 제안이 있었고, 거기에 맞춘 구조를 만들어 낸 것이 제타"라고 덧붙였다.
잉크와 팁 개발을 담당하는 팀 간의 협업을 통해 완성된 제타는 혹독한 내구성 테스트도 거쳤다. 연구실 옆에 마련된 물성테스트실에서 '기계필기테스트기'를 통해 각도나 하중 등을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와 같이 볼펜이 가져야 하는 기능성들을 확인하는 것이다. 600~700m까지 총필을 측정하는 것도 검사 항목에 들어간다. 60℃·습도 80%로 설정된 항온항습기로는 제품 보관 수명도 체크한다. 보통 항온항습기 안에서의 30일을 상온에서의 1년으로 가정하는데, 최대 120일까지 제품 상태가 양호함이 확인됐다.
모나미 본사 1층에 위치한 모나미 스토어 내부 모습. 매장 가운데 위치한 잉크랩에서는 다양한 색상의 잉크로 나만의 색상을 디자인 할 수 있다. 사진/모나미
이 연구원의 올해 주력 과제는 5세대 잉크의 뒤를 이을 차세대 잉크를 개발하는 일이다. 5세대 잉크가 제타 이외에 올 봄 '삼일절 에디션'으로 첫 선을 보인 'FX153', 모나미 153 리스펙트 등 주요 제품에 보편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 단계 더 진화한 필기감을 제공하기 위해 역량을 모으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6세대 잉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발될 지는 아직 알 수 없다"면서도 "잘써지고 부드럽고 찌꺼기가 나오지 않는, 수성과 유성의 장점을 모을 수 있는 방향으로 갈 것은 분명하다"고 전망했다.
그렇다면 이 연구원이 생각하는 필기구의 미래는 어떨까. IT기술의 발전으로 필기구의 사용빈도가 현저히 줄어들면서 고객층이 학생들을 중심으로 많이 축소됐고, 이에 따라 시장 규모도 줄어든 현실에 대한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 연구원은 "과거에는 먹물과 붓이 필기구였지만 지금은 이를 필기구로 사용하는 사람은 없지 않냐"며 "사용 환경 변화에 따라 붓이 필기구가 아닌 회화도구로 살아남은 것과 같이 지금의 필기구도 다른 용도로는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정확히 표현하기는 애매하지만 필기구가 사라질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며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 연구원은 신입사원 시절 한 선배가 해줬던 말을 소개했다. "세상에는 폭탄을 만든다든지, 환경에 안좋은 제품들을 만드는 회사가 많은데, 모나미는 문화와 문화를 전달하고 교육을 지원하는 좋은 회사"라며 "다음 세대들과 연결할 수 있는 필기구를 만들어보겠다는 포부를 갖는 것은 어떠냐"라고 조언했다는 것. 그는 "이 말이 동력이 되서 지금까지 달려올 수 있었다"며 회사에 대한 애정과 일에 대한 자부심을 표했다.
김진양 기자 jinyangkim@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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