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배우 전도연을 두고 흔히들 '칸의 여왕' 혹은 '멜로의 여왕'이라고 한다. 어떤 장르, 어떤 캐릭터를 만나든 전도연 앞에 붙은 '여왕'이란 수식어는 흔들림이 없다. 딱히 상업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할 때도 마찬가지다. 매 작품마다 진폭이 큰 감정을 온전하게 전달하는 연기력, 어떤 촬영현장에서든 온몸을 바치는 에너지 등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제목에서 짐작되듯 신작 '남과 여'를 통해서는 '멜로의 여왕' 전도연을 만날 수 있다. 촬영현장에서 불 같은 열정을 보이는 배우로 인정받는 전도연은 이 영화에서 무뚝뚝하다 못해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지 않은 상민으로 분한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어필하는 기홍을 만나 조금씩 스며드는 사랑을 느끼는 상민을 연기한다. 언제나 그래왔듯 연기는 일품이며, 예쁘기까지 하다.
"매번 작품하고 나면 '연기 잘했다'는 칭찬만 받았는데, 이번에는 '예쁘다'는 칭찬을 더 많이 받네요. 참 기분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는 전도연을 최근 서울 삼청동 소재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전도연은 여왕이라는 수식어에 대해 "정말 여왕이면 여왕 대접을 해줬으면 좋겠다"면서 밝게 웃어보였다.
배우 전도연. 사진/쇼박스
"난 뜨거운데, 상민은 뜨겁지 않은 여자라서"
'남과 여'는 겉으로만 보면 불륜을 소재로 한 치정멜로로 인식될 수 있다. 하지만 치정멜로로 치부되기엔 기존의 레퍼런스를 따르지 않은 지점이 많다. 치정멜로라 하면 악역으로 보이는 못된 남편 혹은 아내가 있거나, 사랑을 하는 당사자들의 성격적인 문제가 존재했다. 하지만 '남과 여'의 등장인물들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비록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가정의 파탄'으로 이어질 정도의 심각한 문제는 없다.
이러한 영화적 장치는 상민과 기홍의 사랑이 온전히 두 사람의 감정으로만 이뤄진 관계임을 명확히 한다. 어떤 말이든 애매하게 말하기에 속마음을 읽을 수는 없지만 상민에게만큼은 적극적인 기홍과 자신을 향한 뜨거운 구애에 서서히 스며드는 상민의 사랑은 자극적이지 않다.
상민을 연기한 전도연은 두 사람의 사랑이 온전히 둘 만의 관계로 보이길 기대했다.
"'남과 여'는 엄밀하게 말하면 불륜이 맞아요. 오해의 요소들이 분명히 있지만, 둘만의 사랑이야기거든요. 그렇게 사랑 이야기만 해서 좀 더 편했던 거 같아요. 가장 어려웠던 건 관객들이 '온전히 둘만의 관계로 볼 수 있을까'였어요. 상민과 기홍은 시작부터 무엇으로 인해 사랑한 게 아니라 그저 둘로 인해 사랑한 거예요. 사랑 이외의 다른 감정을 차단한 게 좋았어요."
배우 전도연. 사진/쇼박스
핀란드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잠자리를 갖는다. 기홍은 상민에게 빠진 듯 이름과 연락처를 물어보지만, 상민은 도망쳐버린다. 핀란드에서의 판타지는 그저 판타지로 머물게 할 생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디자이너 숍을 운영하는 상민은 8개월 만에 자신을 찾아온 기홍을 만난다. 자신에게 적극적인 기홍에게 마음을 닫으려 하지만 서서히 빠져드는 감정을 막지는 못한다. 전도연은 자신을 '뜨거운 여자'라면서 상민은 뜨겁지 않아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고 말했다.
"전 사랑할 때 뜨거워요. 깊이 빠져드는 타입이에요. 그런데 제가 생각한 상민은 사랑에 대한 뜨거움을 느껴본 적 없는 여자 같았어요. 표현하지도 받지도 못하면서 마흔 가까이를 채운 여자죠. 기홍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었고, 기홍을 받아들이면서 상민도 '자기가 뜨거운 것을 가진 여자'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연기하기 전에 '상민은 나와는 좀 다른 여자인데 캐릭터가 변질되지는 않을까'라면서 걱정했어요."
전도연의 걱정은 기우에서 그칠 것 같다. 상민의 행동과 대사는 전도연이 아닌 상민으로 느껴진다. 수 없이 많은 캐릭터를 연기했음에도, 인간 전도연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가 여왕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배우 전도연. 사진/쇼박스
"내가 집착하는 것은…"
1997년 영화 '접속'으로 이름을 알린 것을 시작으로 '약속', '해피엔드',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너는 내 운명'에 이르기까지 전도연은 늘 사랑을 다뤄왔다. 감정의 폭이 깊었고, 사랑할 때의 희노애락을 훌륭히 표현해왔다. '밀양' 이후 '칸의 여왕'이 되면서 그가 맡는 캐릭터는 더욱 깊어졌다. 충무로에는 감정의 진폭이 큰 캐릭터가 탄생하면 1차적으로 전도연에게 전달된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다.
많은 관객들이 전도연의 연기에 감동받고, 진한 여운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도연은 도대체 어떤 태도로 연기를 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여왕으로 치켜세우는 것일까. 자신의 연기가 칭송을 받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는지 물었다.
"사람들은 제 연기가 부담스럽다고 하던데요. 잘은 모르겠지만 제가 집착하는 게 있어요. 제가 느끼는 것에 대한 집착이요. 예를 들어 상민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데, 그게 전도연의 감정인지 상민의 감정인지, 무엇이 진짜인지 깊이 파고들어요. 내가 진짜라고 믿는 감정에 대해 의심하는 거죠. 내가 느낀 감정이 진짜일까라는 생각이요. 그런 고민이 저를 힘들게 해요.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관객들은 재밌게 영화를 볼 수 있을 거예요. 근데 그 집착이 쉽게 놓아지지 않네요. 아마도 이 것만큼은 연기를 하는데 있어 계속 놓지 못할 것 같아요."
'밀양' 이후로 전도연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돈을 갚지 않은 옛 남자친구를 만나 그 돈을 받아가는 하루 동안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넓어지는 '멋진 하루', 계급 상승을 위해 가정이 있는 남자를 유혹한 '하녀',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수년간 가족과 생이별을 한 '집으로 가는 길',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술집여자였던 '무뢰한'까지 전도연은 언제나 각기 다른 깊은 감성을 품고 관객 앞에 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연은 여전히 배역에 목마르다고 했다.
"'밀양'이 전환점이 된 거 같아요. '밀양' 이후 저한테 배우로서 다른 스테이지가 열렸어요. 결혼도 했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작품을 선택할 때 제가 느끼는 부분의 포인트가 달라진 거 같아요. 지금까지의 선택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에요. 여전히 전 제 캐릭터 선택의 폭은 넓히고 싶어요."
배우 전도연. 사진/쇼박스
'남과 여'의 다음 행보로 전도연은 드라마를 택했다. SBS '프라하의 연인' 이후 11년 만이다. 제목은 '굿 와이프', 미국 CBS에서 방영되며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모았던 동명원작의 리메이크 작품이다.
전도연은 "'남과 여'가 이전까지 보여줬던 연기라고 한다면 이번에는 법정스릴러물에서 씩씩한 여성을 연기한는 점에서 기대된다"며 웃어보였다. 오랜만의 드라마 촬영이라 무섭기도 하고 설렌다면서도 '연기의 여왕'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게 그는 어느새 새로운 출발선에 다가가고 있었다.
함상범 기자 sbrai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