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토마토 양지윤기자] A: "자꾸 물어 보지마, 연말에 잘릴 지도 몰라."
B: "맞아, 맞아."
A: "(B 사장은) 오래 했어. 난 3년 했는데, 여기가 몇년 했어?"
B: "난 2년이니까 여길 먼저 잘라야 돼."
A: "그러니까 (기자들이) 나한테 안 물어보잖아."
B: "나이순으로 내가 먼저 잘려야 되고, 선배 사장님 순으로는 저기를 먼저 잘라야 하고."
A: "할배 순서로는 내가 먼저지."
지난달 20일 오전 9시,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
한국석유화학협회가 매달 주최하는 사장단 조찬 모임이 끝난 직후 차량을 기다리던 최고경영자(CEO)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석유화학 업황은 어떻습니까." 서로 대답을 떠넘기다 "대답 잘못했다간 잘릴 수도 있다"는 익살스러운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내용을 듣다가 재미있다는 생각에 그만 '킥'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사실 이날 사장단 조찬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된 분위가 역력했습니다. 주요 기업들의 인사가 코앞으로 다가온 터라 누군가에겐 마지막 조찬이 될 수도 있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A와 B 사장이 '저쪽이 먼저 잘릴 것'이라고 농담을 건넸지만, 며칠 뒤엔 진담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2~3년째 계속된 업황 침체로 수익은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고, 향후 전망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그야말로 '시계제로' 상태에 놓인 탓입니다. 특히 올해는 유례 없는 불황으로 각 석유화학 기업들은 매 분기마다 극도로 부진한 성적표를 쏟아냈습니다. 때문에 이번 주요 석유화학 기업들의 인사는 그 어느 때보다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달 18일 오전 플라자호텔. 이날 조찬은 지난달보다 한결 분위기가 부드러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연말을 앞두고 회원사 사장단이 모두 참석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거의 모든 석유화학 기업들의 내년 인사가 마무리되면서 인사에 대한 부담감은 덜어낸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긴장감이 완전히 가신 것 같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내년 역시 국내 석화업계의 가장 큰 시장인 중국에서 수요가 회복될 지 여전히 불투명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내년 1월1일부터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탄소배출거래제' 등이 시행돼 과징금 부담까지 짊어져야 할 판입니다.
한국석유화학협회는 내년 2월에 차기 협회장 선임을 앞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업계 안팎에서는 어느 누구 하나 선뜻 나서기 힘들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각 기업들이 대내외 악재 속에서 악전고투 중인 만큼 최고경영자들이 대외활동에 나서기보다 내 집 살림살이에 더 신경을 쓰지 않겠냐면서 수긍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일까요. 석유화학협회는 당초 올 연말쯤 차기 회장 후보군을 선정할 계획이었습니다. 내년 1월 중 적임자를 선정해 2월 총회에서 신임 회장을 추대한다는 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계획과 달리 차기 협회장 선정은 전혀 진척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게 업계 고위 관계자의 전언입니다. '나부터 살아야겠다'는 절박감이 서로의 움직임을 묶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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