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새벽 검찰 조사를 마치고 나오는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News1
[뉴스토마토 이상원기자] '땅콩'이라는 단어가 이처럼 크게 느껴진 적이 있었을까.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이 연말 재계를 강타했다. 조 전 부사장이 재벌 3세 '갑질'의 종결자로 등극하면서 이번 사건이 재벌가 윤리의식과 재벌 2·3·4세로 이어지는 경영 승계의 문제점으로까지 비화되고 있기 때문.
이른바 땅콩 회항의 내용은 이렇다.
조 전 부사장은 지난 5일(현지시간) 뉴욕 JFK공항에서 이륙을 준비하던 대한항공 KE086 일등석에서 견과류 서비스가 규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항공기를 탑승게이트로 되돌리는 램프리턴을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조 전 부사장이 승무원과 사무장을 상대로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고, 사무장은 강제로 비행기에서 내리도록 했다.
이로 인해 300여명이 탑승한 비행기가 안전을 무시한 채 움직였고, 비행기의 안전을 책임지는 조종사와 사무장, 승무원은 재벌 3세의 횡포 앞에 권한을 내려놓았다.
사상 초유의 일이 국내는 물론 주요 외신을 통해 전해지면서 파장은 국제적 망신으로 확대됐다. 이내 '땅콩 회항'은 재벌가 전체의 문제를 점검하는 계기로 작동했다.
창업 선대인과 같이 밑바닥에서부터 경영을 배우거나 아버지 세대와 같이 거친 경쟁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아버지를 혹은 할아버지를 잘 만난 덕으로 경영 일선에 나선 이들에 대한 사회적 비판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교육을 받고, 별 다른 어려움 없이 임원으로 초고속 승진한 것이 어이 없는 특권의식과 비윤리적인 재벌가의 인간성으로 되돌아 왔다는 비아냥까지 쏟아졌다.
그러면서 과거 있었던 재벌가 3·4세의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까지 회자됐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조카이자 신준호 푸르밀 회장의 장남인 고 신동학씨는 지난 2000년 음주운전을 하다 사고를 냈지만, 단속 경찰관을 매단 채 질주해 중상을 입히는 대담함을 보였다. 그는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이후에도 마약복용과 폭행 등으로 물의를 일으켰고, 2005년 태국여행 중 실족사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사촌동생이자 물류업체 M&M의 전 대표인 최철원씨는 이른바 '맷값 폭행' 사건으로 유명하다. 최씨는 2010년 회사 인수합병 과정에서 고용승계를 해주지 않는다며 SK본사 앞에서 시위를 하던 한 탱크로리 기사를 회사 사무실로 불러 아구방망이와 주먹으로 폭행한 뒤 맷값으로 2000만원을 던졌다. 그에게 부여된 징벌은 징역1년6월과 집행유예 3년이 전부였다.
2007년에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가죽장갑 보복폭행' 사건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김 회장은 둘째 아들인 동원씨가 술집 점원에게 맞았다는 이유로 해당 점원을 청계산으로 끌고가 보복폭행했고, 이로 인해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둘째 아들 동원씨는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올 초 징역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으면서 또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번 땅콩 회항의 주인공인 조 전 부사장의 남동생 조원태 대한항공 부사장 역시 재벌 3세 갑질의 역사를 썼다. 조 부사장은 지난 2005년 승용차를 운전하던 중 70대 할머니에게 폭언과 폭행을 행사해 경찰에 입건된 바 있다. 누나의 땅콩 회항까지 겹치면서 피는 못 속인다는 얘기가 대한항공 안팎에서 터져 나왔다.
주가 조작으로 100억원대 시세 차익을 올린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LG그룹 방계 3세인 구본호씨도 재벌가의 모럴해저드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구씨는 LG 구인회 창업주의 동생인 구정회 창업고문의 손자다.
구자원 LIG그룹 회장의 장남인 구본상 LIG넥스원 부회장과 차남 구본엽 전 LIG건설 부사장도 경영권 유지를 위해 분식회계를 저지르고 2000억원대 사기성 기업어음을 발행한 혐의로 지난 7월 대법원에서 각각 징역 4년과 징역 3년의 실형이 확정됐다.
그럼에도 올해 연말 인사에서는 재벌 후손들의 초고속 승진이 줄을 이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아들인 구광모 상무는 11월말 인사를 통해 (주)LG에서는 유일한 상무 승진자로 기록됐다. 올해 36세인 그는 차장 승진 2년 만에 부장을 달고, 다시 부장 승진 2년 만에 기업의 별이라는 상무(임원)로 승진했다.
현대중공업 대주주인 정몽준 전 의원의 장남 기선씨는 지난 10월 상무보도 거치지 않고 상무로 초고속 승진했다. 사상 최악의 실적을 기록한 현대중공업그룹은 정씨의 상무 승진과 함께 조선3사 임원 262명 중 31%인 81명을 감축하는 조직개편도 단행해 극명한 대조를 함께 보였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장남 김동관 한화솔라원 영업실장 역시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에 상무로 전격 승진하며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 지난 2010년 1월 (주)한화에 입사한지 5년 만에 상무를 달았다. 그의 나이 올해 31세다.
'땅콩 회항' 사건의 유탄은 내년에도 계속해서 재계로 투하될 가능성이 크다. 새정치민주연합 등 야당에서는 이번 기회를 재벌 개혁의 계기로 삼겠다는 입장이다. 박완주 새민련 원내대변인은 "소유와 경영이 불리되지 못한 전근대적인 재벌문화를 바라보는 국민들은 불행하기 짝이 없다"며 재벌개혁의 의지를 다졌다.
한편 발단이 된 조 전 부사장은 현재 출국금지된 상황이며, 오는 30일 구속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거쳐 결과에 따라 구속여부가 결정된다. 기내에서 사법경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승무원과 사무장을 폭행한 데 대한 항공기안전운항저해폭행죄와 기내 소란 및 300여명의 승객이 탄 항공기를 되돌리게 한 업무방해죄 등을 적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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