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기성기자] 각 기업들이 내년도 경영계획 최종 검토에 돌입한 가운데, 흘러나오는 내용은 대체로 '극도의 긴축경영' 쪽인 것으로 파악된다.
글로벌 경기 불확실성이 여전한데다 국내 경제성장률 역시 2%대에 머무는 저성장 기조가 유지될 것으로 보이면서, 기업들이 저마다 비상전략 마련에 분주한 것이다.
특히 미국과 중국 등의 정치체제 변화는 연말 우리 대선과 맞물리면서 새로운 변수로 부상했다. 게다가 최근 급락한 환율 역시 수출을 옥죄일 악재로 평가된다.
◇투자 축소에 일자리 감축까지..‘빙하기’ 도래
긴축경영의 골자는 투자 축소다.
삼성전자(005930)는 반도체 설비투자에 대한 축소를 사실상 결정했다. 아직 최고경영진의 결재가 남아 있으나 문제는 폭일 뿐, 축소 자체는 불가피해졌다는 게 내부 기류다. 그 일환으로 경기도 화성에 건설 중인 시스템반도체 17라인의 완공 시기를 연기하기로 하는 등 속도 조절에 착수했다. OLED 패널에 대한 본격 양산도 내년으로 미뤄졌다.
현대차(005380)도 외형성장에서 품질경영으로 선회했다. 유럽의 재정위기 공포감이 가시지 않은데다 미국의 장기침체, 중국의 성장둔화 등 대외경제에 대한 가중된 우려는 현대차를 사실상 비상체제로 몰았다는 분석이다. 특히 최근 논란이 된 과장연비 파문은 현대차를 더욱 움츠러들게 할 돌발악재로 작용하면서 위기경영을 더욱 부채질할 전망이다.
SK는 사정이 더욱 안 좋다. 효자종목이었던 통신(SKT)과 정유(이노베이션)가 여전히 부진한데다 과감히 편입했던 반도체(하이닉스) 또한 장기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통신은 과다한 출혈경쟁을 줄이고, 반도체는 내실경영으로 전환해야 하는 숙제가 안겨져 있다. 특히 반도체의 경우 투자 축소는 물론 일각에선 구조조정 가능성까지 언급하는 단계에 직면했다.
LG(003550) 또한 상황이 녹록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LG화학이 내년 시설투자를 올해 목표치보다 8.6%정도 감소한 2조1000억원 수준으로 축소한데다, LG디스플레이는 한자릿수 이상 축소를 목표로 전략 마련에 돌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반기 최대 기대작인 옵티머스G가 예상보다 시장에서 부진할 경우 LG전자 역시 투자 동결 내지 축소가 불가피하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조선·철강·기계 등 전통적 굴뚝산업을 비롯해 최악의 부동산 경기를 맞고 있는 건설의 경우 투자를 집행할 여력조차 없다는 게 현장의 토로다.
포스코(005490)마저 내년에 1조원 이상 투자 축소를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올해 투자 목표치였던 8조9000억원에 대한 집행 여부 또한 불투명해졌다.
철강과 더불어 조선은 이미 마른 수건을 짜고 있는 단계라 원가절감에 목을 매야할 판이다.
현대중공업(009540)과
삼성중공업(010140)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조선의 미래로 각광 받는 해양 플랜트에 도전장조차 내밀지 못하고 있다. 인수합병(M&A)과 사업 확장으로 몸집을 불려온 STX의 경우 유동성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돈 되는 자산은 팔아치워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지상과제 수행에 돌입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른 내년 국내 시설투자 규모는 80조원대로 추정된다. 이는 올해 시설투자 예정치 93조6000억원에서 최소 14조원 이상이 줄어드는 것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시설투자가 줄어든 것은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과 미국의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덮친 2009년 등 단 두 차례밖에 없었다"며 "또 다시 투자 빙하기가 오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투자 축소는 고스란히 일자리 감소로 이어질 전망이다. 특히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가계에 대한 압박감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이는 소비 침체를 불러와 결국 기업들의 경영난이 가중되는 악순환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12일 한 언론이 국내 20대 그룹을 대상으로 내년도 채용계획에 대해 질문할 결과 무려 16개 그룹이 ‘올해 수준으로 동결하거나 줄이겠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3개 그룹은 경영계획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답변을 유보했으며, 채용규모를 늘리겠다고 답한 그룹은 단 하나에 그쳤다.
민간경제연구소를 비롯해 주요 경제단체에서는 올해 30대 그룹의 채용 규모인 13만6000명의 최소 15%에 해당하는 2만여명이 축소될 수도 있는 것으로 전망했다. 이른바 채용시장이 얼어붙는 고용 빙하기가 온다는 얘기다.
◇해외투자는 ‘정반대’..경제민주화 반발 ‘의혹’
정반대되는 현상도 잇따르고 있다. 주요 기업들은 투자 축소에 있어 우선순위를 국내로 설정했다. 성장성 있는 해외시장에 대한 공격적 투자는 현지화 전략과 맞물리며 그대로 이어간다는 방침이어서 투자 축소에 따른 어려움은 국내에 집중될 전망이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주춤했던 해외 직접투자는 2010년부터 다시 증가세로 전환하면서 지난해 말에는 444억9000만달러로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2008년(367억5000만달러)과 비교하면 77억4000만달러의 해외 직접투자가 더 집행된 것이다.
특히 올해 들어선 해외투자가 공격성을 띠면서 영토 확장으로까지 뻗는 추세다. 현대차가 브라질 상파울루에 남미시장 공략을 위한 전초기지를 마련한 데 이어 동국제강의 경우 포항의 후판공장 폐쇄 조치에도 불구하고 2015년 완공을 목표로 브라질 제철소 투자는 지속한다는 방침이다.
삼성디스플레이가 지난 5월 중국 쑤저우(蘇州)에 8세대 액정표시장치(LCD) 공장을 착공한 데 이어 삼성전자는 중국 산시성 시안(西安)에 70억달러 규모의 반도체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SK이노베이션(096770)은 중국 국영석유회사 시노펙과 합작해 생산설비 건설을 추진 중에 있다. 최근 개발이 진행되는 중국 서부지역을 집중 공략해 중국을 ‘제2의 내수시장’으로 삼겠다는 전략이다. 여기에다 유통 공룡들 또한 중국 진출을 보다 강화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기존 원가절감 차원에서 값싼 노동력을 찾아 헤매던 것에서 벗어나 생산기지를 현지화 하는 전략으로 이동하면서 이 같은 해외 직접투자 추세는 내년에도 이어질 전망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최근 해외 출장길에서 대규모의 동남아 투자를 약속했고, 다른 대기업들도 현지화 전략 포인트를 잡느라 여념이 없다. 단순생산에서 벗어나 디자인과 연구개발, 마케팅 등의 부문에서 해외 현지와의 결합 필요성이 증대됐다는 게 이들 기업의 목소리다.
한편 일각에서는 기업의 생존전략 외에 또 다른 노림수가 있는 것 아니냐는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특히 정치권을 중심으로 이 같은 의혹이 물밑에서 확산 중에 있다.
민주통합당 선대위 관계자는 “기업들의 전략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할 생각은 없다”면서도 “다만 일련의 흐름은 분명 의심 가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경련 등 재계를 대변하는 경제단체의 잇단 협박("재벌개혁 등 규제 강화는 투자 축소 및 일자리 감소로 이어져 성장이 저해된다")을 마치 주요 그룹사들이 뒷받침 하듯 이를 실행하고 또 언론에 흘린다”고 불쾌해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김종인 등 당내 경제민주화 주창론자들과의 충돌에 아랑곳 않고 그간의 강경방침에서 선회한 것 등에는 이런 재계의 흐름이 미칠 국내 경제의 악영향에 대한 우려가 작용했다는 게 새누리당 관계자들의 또 다른 해석이다. 한 관계자는 “김종인 위원장이 지적했던 로비에는 직접적 방식만 있는 게 아니다. 간접적 압박도 공세를 차단하는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사상 최대 실적행진을 통해 곳간을 착착 쌓아가고 있는 삼성의 투자 축소에는 분명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반응이다. 특히 삼성이 국내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감안할 때 삼성의 움직임은 여타 그룹들의 동참을 불러온다는 측면에서 연쇄 도미노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특히 경제위기 탓에 투자 축소 등 긴축경영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오히려 이를 공세 소재로 이용, 양수겸장의 수를 두고 있다는 해석도 이어졌다. 한 그룹사 관계자는 "경제 여건을 감안할 때 투자 및 채용의 축소가 불가피하다는 것은 다 알고 있다"면서 "대신 이를 통해 정치권의 경제민주화 공세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면 전략적 포인트로 충분히 삼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해당 기업들은 순환출자 금지, 금산분리 등 정치권에서 마련 중인 지배구조 개선안이 현실화될 경우 막대한 비용의 지출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불확실성에 대한 대비 측면은 인정하면서도 정치권의 반론은 순전히 정략적 해석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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