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국립레퍼토리시즌' 도입을 통해 쇄신을 예고한 국립극장이 오는 9월 첫 작품 <수궁가>로 관객을 만난다. 지난해 9월 초연된 <수궁가>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수제자인 오페라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와 국립극장 전속 창극단인 국립창극단이 공동제작한 '판소리 오페라'다.
초연 당시 이 작품은 표현주의 화가이기도 한 아힘 프라이어의 손을 거쳐 탄생한 상상력 넘치는 무대장치와 안숙선 명창을 앞세운 국립창극단의 원숙한 소리가 어우러진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짧은 공연기간 탓에 공연을 미처 보지 못한 관객들에게는 진한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이번 레퍼토리 시즌 중에는 오는 9월 5일부터 8일까지 총 4일간 공연된다. 도창을 맡은 안숙선 명창이 3미터 높이의 거대한 한복 치마를 입고 나오는 등 공연의 주요 콘셉트는 지난해와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3시간이라는 다소 부담스러운 런닝타임은 20분 가량 줄어들 예정이다. '창극의 대중화'를 지향하는 제작진이 관객을 위해 마련한 작은 배려인 셈이다.
올해 국립창극단은 판소리를 모태로 하는 창극을 세계적인 공연예술로 거듭나게 한다는 비전을 세웠다. 창극 세계화의 머릿돌을 놓는 막중한 임무는 올초 부임한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사진)이 맡았다.
지난 21일 만난 김성녀 예술감독은 창극 하는 심정을 묻자 '마치 독립운동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답했다.
비인기 장르의 설움을 올림픽의 비인기 종목에 비견하기도 했다. 김 감독은 "비인기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은 많은 경제적 투자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창극 투자 활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대통령이 독도에 가는 것처럼 정치인들이 창극 보러 올 결단을 했으면 좋겠다"며 사회지도층의 각별한 관심을 요청하기도 했다. 다음은 김 감독과 나눈 일문일답.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지 5개월이다. 현황파악이 어느 정도 끝났을텐데 그동안 어떤 부분에 가장 중점을 두고 창극단을 살펴봤나?
▲단원들과의 소통에 가장 많은 힘을 썼다. 앞으로 창극단이 어떻게 갈 것인가, 그 계획을 세우다 보니 5개월이 훌쩍 갔다.
-36년 전 창극단에 4년 정도 몸 담았다. 그때와 비교하면 분위기가 어떤가? 많이 달라지지 않았나?
▲그 때는 선생님들이 많이 계셔서 젊은 단원들이 예의 차리느라 말할 것도 못했다. 가부장적인 집안 분위기랄까? 하지만 지금은 어른이 별로 없어 젊은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서 민주적으로 끌어가는 단체로 변해 있는 것 같다.
-많이 발전했겠지만 예술감독으로서 아쉬운 점, 부족한 점이 보일텐데. 어떤 점이 가장 눈에 밟혔나?
▲예전부터 판소리나 창극은 마니아층에 의해 지켜져왔고, 그분들이 응원하는 힘으로 명맥을 이어 왔다. 올림픽에서 비인기종목처럼 그저 그 자리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힘에 의해서 버텨왔는데 그게 늘 아쉽다. 대중들과 우리 것을 함께 즐길 수 있는 풍토가 마련되어야 하는데… 창극단이 만들어진 지 50년 됐는데 내가 아직도 이런 얘기하고 있나, 이런 생각도 든다.
-배우로서 창극 말고도 마당놀이, 연극, 뮤지컬 등 여러 장르를 거쳤다. 이런 다양한 경력이 창극단 예술감독으로 일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음악극, 그러니까 창극부터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소리와 몸짓이 융합적인 매력으로 나타나는 종합예술쪽에서 나는 앞서 왔다고 생각한다. 내가 해왔던 것들에서 익힌 여러가지 안목이 창극의 대중화에 기여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했으면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너무 전문인들끼리만 즐기다 보면 그 함정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지 않을까? 우리 소리나 우리 창극의 장점과 대중이 좋아하는 모티브를 접목시키는 역할을 내가 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국립레퍼토리시즌'의 첫 문을 국립창극단이 연다. 부담감은 없는지?
▲국립극장 시즌제의 첫 개막공연으로 수궁가를 한다고 했을 때. '왜 작년에 했던 것을 또 하냐'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레퍼토리시즌이라는 것이 좋은 작품을 다시 보여주자는 취지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수궁가>가 개막작으로 적격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작년에는 오랫동안 준비했는데 짧게 공연할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사실은 아직 많은 사람들이 이 공연을 보지 못한 상태다.
또 이밖에 좋은 공연, 세계적 거장이 만든 공연이 레퍼토리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앞으로 이렇게 좋은 작품들이 레퍼토리화 될 것이다', 또 '못 본 사람들을 위해 재공연 될 것이다'라는 의미도 있고… 사실은 <수궁가>를 본 사람들이 '앞으로 재미 없을 것이라 예상해 공연보러 안 오면 어떻게 하나' 그런 우려도 있다. 하지만 재미의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작품이 좋으면 재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레퍼토리 시즌의 개막작으로서 <수궁가>가 충분히 역할을 해낼 것이라는 믿음도 있다.
-앞으로 <수궁가> 정도의 퀄리티를 계속 유지해야 된다는 게 부담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앞으로 창극 레퍼토리는 어떻게 꾸려질 계획인지?
▲결과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앞으로 창극은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시도를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패를 걱정하면 그냥 안주해야 하는데 그러면 발전이 없다. <수궁가>의 퀄리티에 맞는 그런 작품들을 만드려면 앞으로 계속 나아가면서 시행착오도 겪어야 하고, '아, 방향을 이렇게 틀어야 되겠다'는 공부도 필요한 것 같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내가 예술감독으로 있는 동안에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도록 할 생각이다. 창극이 대중화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도록 창극과 대중 간 거리를 좁히는 일을 용기있게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전부터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사실 우리나라 역사 중 판소리가 차지하는 역사는 고작 수백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창극도 이제 겨우 100년을 넘겼다. 그러니까 아직은 실패를 두려워하면 안된다는 생각이다.
-향후 레퍼토리에 아힘 프라이어 말고도 외국 연출들이 참여할 계획이라고 들었다. 구체적인 내용을 조금 소개해 준다면?
▲예술감독으로 취임하면서 큰 틀을 세 가지로 잡았다. 그동안 우리 전통의 5바탕은 한국의 유명 연출가들에 의해 많이 재현됐고, 여러가지 실험도 거쳤다. 그런데 창극 세계화의 교두보로서, 세계 명장들이 우리 5바탕을 다시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이 첫번째로 머리 속에 있다. 이건 아힘 프라이어의 경우를 보면서 느낀 것이다. 아힘 프라이어 만큼이나 능력있는 분들이 우리 5바탕을 다시 만들면 창극이 세계로 가는 지름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두번째는 우리 연출가들에 의해 세계 명작 고전들을 재해석해 우리화 시키는 작업을 해보는 것이고, 마지막 계획은 내 임기 동안 판소리 7마당을 재창작해 공연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판소리 12마당 중 5마당은 많이 재현된 반면 7마당은 가끔씩만 재현됐다. 7마당 중에서는 아직까지 한번도 재현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 세 가지 꼭지가 잘 어우러진다면 창극의 중흥을 위해 굉장히 중요한 발판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다 덤으로, 청소년을 위한 창극도 해볼 생각이다. 청소년 때부터 창극에 관심을 갖게 하는 작업을 해야 관객 저변이 확대되는 게 아닌가 싶다.
-창극의 매력은 뭘까? 대중 입장에서는 창극을 접하기도 전에 창극 세계화라는 말을 접하는 셈인데. 창극을 잘 모르는 대중들에게 창극의 매력에 대해 소개해달라.
▲판소리는 1인 모노드라마이자 종합예술로서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독특하고, 또 하나 밖에 없는,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음악이다. 이런 판소리를 극대화한 게 창극이다. 혼자서 하는 판소리를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들면서 장점을 극대화시킨다. 창극의 매력은 판소리의 매력에서 찾을 수도 있고, 뮤지컬이나 음악극적인 매력에서 찾을 수도 있다.
판소리를 안 들어본 사람은 창극의 매력이 뭔지 잘 모를 수 밖에 없다. 와서 접해봐야 '저렇게 독창적이고 하나 밖에 없는, 우리 정체성을 품고 있는 예술을 우리가 갖고 있구나'라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자부심이 관객에게 바로 창극의 매력으로 여겨지지 않을까 싶다. 연애할 때 사랑이 싹트려면 많이 만나고 접해야 하듯이 일단은 대중들이 창극을 많이 접해야 한다. 그래야 이게 세계적인 음악극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매력도 느낄 수 있다.
또 요즘 판소리에서 소리꾼 이자람이 브레히트 작품을 토대로 판소리를 만드는데 그런 스타가 창극에서도 나온다면 사람들이 창극을 '인기종목'으로 만들어주지 않을까 싶다. 그런 기적을 만들고 싶다. 기적은 결국 사람들이 만드는 거다.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사실 판소리꾼들이 해야 한다. 우리 판소리꾼들이 이런 의식을 가지고 열린 마음으로 열심히 한다면 창극의 매력을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주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것이 우리 창극단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나볏 테크지식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