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백아란 기자] 올해 국내 신용평가 시장은 인공지능(AI)발 슈퍼사이클 등 산업 전환의 파고 속에서 기업별 명암이 갈렸습니다. 기업 신용도는 ‘꿈’을 먹고 자라는 주가와 달리, ‘현금 창출력’ 등 재무안전성을 기반으로 산정되는 만큼 글로벌 산업 변화에 따라 기업 평가도 나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전통적 효자 산업인 석유화학과 배터리가 고전하는 사이, 현대자동차그룹과 SK하이닉스 등 자동차, 반도체 기업은 ‘초우량’ 지위를 공고히 하며 내년 산업 지형도의 변화를 예고했습니다.
서울 남산공원에서 바라본 을지로 마천루 전경. (사진=뉴시스)
22일 뉴스토마토가 신용평가사 3사 신용도를 분석한 결과, 올해 들어 투자 적격 등급 중 가장 높은 AAA로 신용등급이 상향된 기업(비금융·비공기업 기준)은 전무했으며 초우량 등급인 AA+로 상향된 기업은 현대글로비스 한 곳으로 집계됐습니다.
이달 초 한국기업평가와 나이스신용평가는 현대글로비스 등급을 기존 ‘AA(긍정적)’에서 ‘AA+(안정적)’으로 상향 조정했습니다. 등급 상향 조정 배경에는 현대차 계열 중심의 안정적 사업 기반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대차 등 고정 매출처가 확보된 상태에서 완성차 수출 물량 확대와 해운 부문의 수익성 개선이 맞물린 까닭입니다.
황종 나이스신용평가 연구원은 “현대차 그룹의 대미 투자에 따른 현지 생산능력 향상과 국내 자동차 산업 회복 등으로 중장기 매출 성장이 예상된다”고 평가했습니다. 신용평가사들이 통상 12~18개월의 시간 차이를 두고 실적 개선을 신용등급에 반영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대차 그룹의 지속적인 성장 기대는 이어지는 모습입니다.
실제 지난해 신용평가 시장의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현대차와 기아의 AAA 동반 획득이었습니다. 그간 비금융·비공기업 기준 SK텔레콤과 KT만 받았던 최고 등급 철옹성을 현대차와 기아가 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물류 핵심 계열사인 현대글로비스 신용도까지 상향되며 그룹 전반의 신용도가 격상된 상황입니다.
(인포그래픽=뉴스토마토)
SK하이닉스 또한 유의미한 성과를 냈습니다. 신용평가 3사는 올해 하반기 SK하이닉스의 신용등급 전망을 기존 ‘AA(안정적)’에서 ‘AA(긍정적)’으로 올렸습니다. 몸집이 큰 대기업의 경우 재무 구조 변화가 쉽지 않아 전망 변경이 크지 않은데, SK하이닉스는 반도체 슈퍼사이클을 타고 체급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실제 SK하이닉스는 올해 3분기 누적 영업이익만 28조원을 기록하고 있으며 내년에는 영업이익이 80조원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상황입니다. 이에 따라 최대주주인 SK스퀘어 역시 자회사 실적 개선의 낙수효과를 누리며 등급 전망이 ‘안정적’에서 ‘긍정적(한국신용평가 기준)’으로 올라가는 반사이익을 거뒀습니다.
방위산업의 대장들 역시 올해 ‘우량 등급 대열’에 대거 합류했습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한화시스템, LIG넥스원 등 방산 기업들은 올 하반기 나란히 AA 등급을 획득했습니다. 러-우 전쟁 이후 고조된 글로벌 전시 분위기가 수그러들지 않은 것이 주효했다는 분석입니다. 조선에서는 HD현대와 HD현대중공업, HD현대일렉트릭의 신용등급 전망이 안정적에서 긍정적으로 개선됐습니다.
반면 한때 국내 산업의 자존심이었던 LG화학의 위기는 현재진행형인 상황입니다. 지난해 국내 신용등급 전망이 ‘부정적’으로 돌아선 데 이어, 올해는 무디스와 S&P 등 글로벌 신용평가사들로부터 등급 강등의 고배를 마셨기 때문입니다.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정체)에 따른 이차전지 부문의 실적 둔화와 석유화학 부문의 부진이 원인으로 꼽힙니다. 과거 시가총액 3위까지 치솟았던 위상은 사라지고, 현재는 대규모 투자 부담과 부채 증가라는 이중고를 겪으며 신용도 방어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형국입니다.
신용평가사들은 석유화학, 건설, 철강 업종의 경우, 내년 신용도 역시 비우호적이라고 평가했으며, 해운·정유·항공은 안정적으로, 반도체·조선·방위산업은 우호적일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한 신평사 관계자는 “글로벌 성장률이 둔화되는 가운데 보호무역 기조, 중국의 과잉생산 등 대외 불확실성이 산업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다”며 “원화 약세의 경우 내수에는 부담으로 작용하나 수출산업에는 가격 경쟁력 강화 요인이 될 수 있고, AI 투자 확대와 글로벌 공급망 재편 등도 업황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라고 했습니다.
백아란 기자 alive020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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