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의 노천 석탄 광산들 가운데 하나인 미국 와이오밍주의 노스 앤틸로프 로셀 탄광. 석탄층의 높이가 24미터에 이른다. (사진=Wikipedia)
[뉴스토마토 서경주 객원기자] 2015년 12월12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에서 196개국이 역사적인 합의에 서명했습니다. 파리 협정의 핵심은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2℃ 이하, 가능하다면 1.5℃ 이하로 제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각국은 자발적으로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를 제출하고 주기적으로 이행 상황을 점검하고, 선진국은 개도국의 기후 대응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협정 채택 10년이 지난 지금, 약속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오히려 커지고 있습니다. 최근 스톡홀름 환경연구소(SEI)와 국제지속가능발전연구소(IISD)가 공동 발표한 ‘2025년 생산 격차 보고서(Production Gap Report)’는 “여러 나라들이 기후 목표와는 정반대로 화석연료 생산을 늘리고 있다”는 모순된 현실을 보여줍니다.
‘생산 격차’ 2023년보다 커져
보고서가 제목으로 내세운 ‘생산 격차(production gap)’란 개념은 단순합니다. 1.5°C 목표를 달성하려면 2030년까지 화석연료 생산을 급격히 줄여야 하지만, 실제 정부 계획은 석탄·석유·가스 생산을 유지하거나 늘리는 쪽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가 바로 생산 격차입니다.
이번 보고서의 공동 저자인 SEI 선임 과학자 데릭 브뢰크호프(Derik Broekhoff)는 “2030년까지 전 세계 화석연료 생산은 1.5°C 목표에 필요한 수준보다 120%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는 2023년의 110%에서 더 악화된 수치입니다.
특히 중국, 미국, 인도 등 세계에서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20개국은 2023년보다 오히려 더 많은 화석연료를 생산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들 국가가 전 세계 화석연료 생산량의 약 80%를 차지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파급력은 실로 엄청납니다. 보고서는 이 가운데 17개국이 최소한 하나 이상의 화석연료 생산을 2030년까지 늘리겠다고 밝힌 점에 주목했습니다. 따라서 석탄은 2035년까지, 석유와 가스는 2050년까지 생산 증가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탄소 예산 소진과 임계점 임박 가능성
보고서가 경고하는 위험은 단순히 기온 상승의 문제가 아닙니다. 화석연료 생산 확대는 곧 소비 증가로 이어지고, 그 결과 지구 평균 기온을 특정 한계 이내로 억제하기 위해 인류가 배출할 수 있는 이산화탄소의 총량, 즉 탄소 예산(carbon budget)이 빠르게 고갈됩니다. 결국 지구 기후 시스템이 되돌릴 수 없는 임계점(tipping point)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생산 확대를 위한 인프라 증설 또한 문제입니다. 한번 건설된 채굴·수송·정제 시설은 정책이 바뀌어도 쉽게 폐쇄되지 않고, ‘좌초자산(stranded assets)’으로 남아 장기적 부담을 초래합니다.
그 피해는 생태계와 인류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납니다. 폭염과 가뭄, 해수면 상승, 이상기후가 더욱 빈번해지고, 식량 안보와 물 공급, 공중보건에도 심각한 타격을 줍니다. 특히 개발도상국과 저소득 지역은 그 충격을 더 크게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파리 협정 이후 많은 나라들이 기후 대응 정책을 수립했지만, 정책과 생산 계획 사이의 모순은 여전히 심각합니다. 화석연료 산업은 막대한 세수와 일자리를 창출하며 지역 경제를 지탱합니다. 이 때문에 각국 정부는 감축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회피하려 하고, 일부는 에너지 안보와 공급 안정을 이유로 석유·가스 생산 확대를 정당화합니다.
탈탄소화(decarbonization)를 외치지만 구체적인 로드맵이나 법적 구속력을 갖춘 정책은 부족합니다. 재생에너지 인프라 확충과 화석연료 설비 전환에 대한 투자 없이 제시되는 감축 목표는 공허한 선언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말보다는 구체적인 행동
2025년 보고서는 선언과 현실의 괴리를 줄이기 위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안합니다.
△ 화석연료 생산의 과감한 감축 △화석연료 산업에 대한 보조금·세제 혜택 단계적 철폐 △취약 계층과 개발도상국을 고려한 기후 정의(climate justice) 원칙에 입각한 전환 전략 △생산 계획과 감축 목표의 투명한 공개 △국제적 감시 시스템 구축.
파리 협정 이후 10년, 전 세계가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언과 목표만으로는 지구의 온도 상승을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이 이번 보고서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각국 지도자들이 행동하지 않는다면, 탄소 예산은 고갈되고, 임계점은 빠르게 다가올 것입니다.
서경주 객원기자 kjsuh57@naver.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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