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표진수·오세은 기자] 미국이 일본에 이어 유럽산 자동차에 대해서도 관세를 15%로 낮추면서, 한국 완성차 업계가 전례 없는 위기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한국은 15% 관세율로 최종 합의를 봤으나, 아직 협상이 완료되지 않아 현재까지 25% 관세가 부과되고 있어, 타국가와 동일한 가격 경쟁 조건 확보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에 따라 국내 최대 완성차 기업인 현대차는 미국 현지 생산 비중을 현재 40%에서 80%까지 대폭 확대하는 공격적인 현지화 전략을 추진하며, 관세 부담을 최소화하고 수익성 확보에 나선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습니다.
지난 16일 경기 평택시 포승읍 평택항 자동차 전용 부두에 수출용 차량이 세워져 있다. (사진=뉴시스)
현재 미국 시장에서 현대차 대형 스포츠유틸리티(SUV) 팰리세이드는 BMW X7과 비교할 때, 3만~4만달러의 가격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유럽의 관세 인하 효과가 본격적으로 반영되면 소비자의 체감 차이는 줄어들게 됩니다. 프리미엄 브랜드와의 간극이 좁혀지면 현대차가 강점으로 내세운 ‘합리적 가격 대비 성능’ 전략도 힘을 잃을 수 있습니다.
7월 말 15% 관세 합의라는 희소식이 있었지만, 후속 협의가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일본에 이어 유럽연합(EU)마저 관세 혜택을 받게 되면서 한국은 홀로 25% 관세 족쇄를 차고 미국 시장을 헤쳐 나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업계 관계자는 “기업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한 상황이기 때문에 정부의 대미 관세 협상 후속 협의가 조속히 마무리되길 기원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국내 완성차 최대 업체인 현대차는 관세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재고 물량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지난 8월까지는 가격을 올리지 않은 채 기존 물량을 판매해 관세 부담을 소비자에게 전가하지 않는 ‘관리 모드’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재고 소진 이후에는 선택지가 좁아집니다. 가격 인상이 불가피해지면 수요 위축으로 직결되고, 가격을 현대차 홀로 다 감내하면 수익성이 악화되는 ‘이중고’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단순한 가격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위기임을 경고합니다. 일본과 유럽이 미국 시장에서 관세 혜택을 받는 반면, 한국만 소외된 상황이 장기화한다면 점유율 하락은 피하기 어렵다는 지적입니다.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본부장이 한미 관세 협상 관련 후속 협의를 위해 지난 15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에서 워싱턴D.C.로 출국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지금 한국 자동차 산업은 미국과의 무역 환경에서 사실상 고립된 상태에 놓여 있는 점을 고려하면, 조속한 타결이야말로 리스크를 줄이는 핵심 전략”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장기적으로는 미국 내 생산 거점 확대가 불가피한 만큼, 정부는 기업이 보다 빠르게 생산 기지를 넓힐 수 있도록 투자 지원과 규제 완화, 인력 확보 및 비자 문제 해결에 선제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지지부진’한 협상…현대차 ‘각자도생’
업계에서는 올해 말까지 관세 25% 협상이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부의 관세 협상이 이처럼 지연되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추고 있던 현대차·기아가 다양한 가격 전략을 구사하는 것도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차는 당장 미 현지 생산을 두 배 늘리는 동시에, 최근에는 미국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옵션 사양을 최적화한 트림을 출시하는 등 수요를 창출하는 데 공을 들이는 등 각자도생에 나섰습니다. 호세 무뇨스 현대차 사장이 지난 18일 뉴욕에서 발표한 중장기 전략의 핵심도 현지 생산 비중을 현재 40%에서 2030년 80%까지 두 배로 늘리는 것입니다. 현재 현대차는 미국 판매량 91만2000대 중 39.5%인 36만 대만 앨라배마공장에서 생산하고 있어, 토요타(55%)나 혼다(72%)에 비해 현지 생산 비율이 현저히 낮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현대차는 기존 북미 생산 거점인 앨라배마 공장의 연간 생산량을 40만대로 늘리고, 조지아주 메타플랜트아메리카(HMGMA)의 생산량도 당초 30만대에서 50만대로 확대하기로 했습니다. 2028년 증설 완료시 최대 90만대를 미국에서 직접 생산하게 됩니다.
호세 무뇨스 현대자동차 대표이사(CEO) 사장이 '2025 현대차 CEO 인베스터 데이'에서 발표하고 있다. (사진=현대차)
미국 소비자 취향에 맞춘 제품 전략도 눈에 띕니다. 현대차는 하이브리드 모델을 18종 이상으로 늘리고, 북미에서 친환경차 판매 비중을 77%까지 끌어올릴 예정입니다. 특히 미 시장에서 인기가 높은 픽업트럭과 상용차 라인업을 강화하고, GM·웨이모·아마존 등 현지 기업과의 협력도 확대합니다.
다만 관세 부담을 가격에는 전가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판매량 증대를 통해 관세 영향을 최소화한다는 전략입니다. 실제로 현대차그룹은 올 들어 지난달까지 누적 판매량은 122만9960대(현대차 65만9319대, 기아 57만641대)에 달해 작년 동기 대비 9.9% 상승하면서 역대 최다 판매를 기록했습니다. 연결 매출 성장률 목표도 기존 3~4%에서 5~6%로 상향 조정했습니다.
아울러 중장기적으로 미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다른 지역의 성장률 목표를 대폭 상향했습니다. 2025년 대비 2030년 권역별 판매량 성장률을 보면 북미는 20%인 반면, 아프리카·중동 35%, 유럽 40%, 인도 40%, 아시아태평양 70%, 중국 150%로 설정했습니다. 특히 그동안 고전했던 중국 시장에서는 현지 특화 전기차를 출시해 점유율 회복에 나섭니다.
현대차는 GM과의 플랫폼 공용화를 통한 원가 절감에도 집중하고 있습니다. 양사의 ‘기술 동맹’으로 120년 가까이 된 GM이 북미와 중남미 등에 구축하고 있는 부품·소재·물류 등을 아우르는 공급망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호근 대덕대학교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는 “(기술 동맹으로) 원가 절감에서 15% 이상의 효과를 볼수 있고, 생산 시설을 공유한다면 일부 관세 허들을 넘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표진수·오세은 기자 realwater@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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