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사이언스)"온실가스 감축 넘어 기후정의 실현까지"
미국 포틀랜드, 기후비상사태 선언 이후 달라진 도시
2025-09-01 09:38:34 2025-09-01 14:19:19
포틀랜드 시민의 기후행동을 촉구하는 기후비상사태 실행 계획. (사진=City of Portland)
 
[뉴스토마토 임삼진 객원기자] "우리는 기후비상사태 속에 살고 있습니다. 포틀랜드가 이에 걸맞은 행동을 취할 때입니다(We are living in a climate emergency. It’s time for Portland to act like it.)." 미국 포트랜드 시의 기후비상사태 실행 계획에 나오는 선언입니다. 
 
2020년 6월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시는 '기후비상사태'를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단순히 탄소를 줄이자는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선언문은 '기후정의(Climate Justice)'를 도시 정책의 중심에 세우겠다고 못 박았습니다. 유색인종, 저소득층, 이주민 등 기후위기 앞에서 가장 취약한 이들이 우선 보호받아야 한다는 철학을 담은 것입니다. 그 후 5년이 지난 포틀랜드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선언에서 실행으로…정의를 도시의 설계 원리로
 
다른 도시들과는 다른 차원의 발상법이 등장한 것은 그 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포틀랜드의 기후행동은 1993년 '온난화 감축 전략'에서 시작됐습니다. 이후 2001년, 2009년, 2015년 단계적 '기후행동 계획'으로 발전했지만, 어디까지나 온실가스 절감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2020년의 '기후비상사태'는 그 궤도를 바꾸었습니다. 
 
시 당국은 선언과 동시에 모든 부서가 "기후정의를 정책 설계의 기준으로 삼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2022년에는 기후비상사태 선언을 구체화한 '기후비상사태 실행 계획(Climate Emergency Workplan)'을 확정, 47개 우선 과제를 담았습니다. 2030년까지 탄소 배출을 절반 줄이고, 2050년 탄소중립(Net Zero)을 달성한다는 목표도 재확인했습니다. 
 
● 2030년까지 향후 8년 이내에 탄소 배출량을 1990년 대비 50% 이상 감축 목표를 내건 포틀랜드. (사진: City of Portland)
 
 
빈말에 그치지 않도록 재원 확보…포틀랜드 청정에너지기금(PCEF)
 
변화를 가능케 한 동력은 재원입니다. 2018년 시민 투표로 도입된 '포틀랜드 청정에너지기금(PCEF)'은 대형 유통사 매출의 1%를 기금으로 조성합니다. 매년 수억 달러가 모이고, 2023년 시의회는 5년간 7억5000만달러를 투입하는 '기후 투자 계획'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돈은 취약계층 주택에 태양광을 설치하고, 저소득층 가구에 냉방기를 보급하는 '쿨링 포틀랜드(Cooling Portland)', 소득 기준 충족 가구에 전기자전거 구매 지원금을 지급하는 'E-바이크 리베이트 프로그램' 등에 쓰입니다. 기후위기 대응이 단순한 환경 정책을 넘어, 주거·교통·복지 정책으로 확장되는 지점입니다. 
 
교통 정책…'로즈 레인'과 이동권 보장
 
교통 부문은 포틀랜드 감축 정책의 핵심입니다. 2020년 시의회가 채택한 '로즈 레인(Rose Lane) 프로젝트'는 주요 간선도로에 버스 전용차로와 대중교통 우선신호(Transit Signal Priority)를 대거 도입했습니다. 교통 혼잡을 줄이고 버스 속도를 높여, 시민들이 자가용 승용차 대신 대중교통을 선택하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동시에 시는 저소득 주민에게 교통 지갑(Transportation Wallet)을 제공했습니다. 버스·경전철 패스부터 공유자전거·전동스쿠터·택시크레딧까지 묶은 패키지입니다. 시 교통공사 트라이메트(TriMet)의 저소득 반값 요금제와 결합되면서, 사회적 약자의 이동권 보장과 탄소 감축이 동시에 추진됐습니다. 
 
규제와 기준…화석연료 억제, 탄소비용 도입
 
포틀랜드는 2020년 말 '내부 탄소비용(Internal Cost of Carbon)'을 도입했습니다. 시의회가 승인한 이 제도는 시의 조달·투자·사업 평가 과정에서 탄소 가격을 반영하게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던 기후 비용을 숫자로 제시해 행정 전반에 기후 기준을 새겨 넣은 것입니다. 
 
화석연료 기반 시설 억제도 강력하게 추진됐습니다. 2019년 처음 도입됐다가 소송으로 무산된 '대형 화석연료 터미널 증설 금지' 조례는 2022년 다시 채택돼 2023년 법원에서 합헌 판결을 받았습니다. 2022년 12월에는 모든 경유를 재생 디젤로 대체하도록 연료 표준을 개정했습니다. 
 
기후위기 이후, 도시의 새로운 얼굴
 
포틀랜드는 2021년 열돔(heat dome) 폭염으로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뒤, 적응 정책에도 속도를 냈습니다. 냉방기 보급, 쿨링 센터 운영, 나무 심기 같은 도시 복원력(Resilience) 투자가 늘어났습니다. 이 과정에서도 PCEF 자금은 취약계층을 우선 대상으로 했습니다. 
 
보고서에는 "기후행동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를 보호할 것인가, 누구를 우선시할 것인가의 문제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기후정의의 철학이 분명하게 담겨 있습니다. 
 
선언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도시들에 울리는 경종
 
포틀랜드는 미국 내에서도 가장 과감하게 기후정의를 제도화한 도시로 꼽힙니다. 시민이 직접 만든 기금, 강력한 화석연료 규제, 교통·복지와 결합된 정책 등은 도시 전환의 모델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물론 포틀랜드의 움직임도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몇 가지 과제들도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 5년간 이어진 '기후비상사태 실행 계획'은 올해 최종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목표 대비 성과는 아직 절반 수준이라는 비판적인 지적도 있습니다. PCEF의 집행 속도와 효율성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포틀랜드의 다양한 움직임은 기후비상사태 선언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세계 대다수의 도시들에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포틀랜드의 선택이 탄소 줄이기에서 도시 전체를 바꾸는 기후정의의 실험으로 확장됐다는 사실입니다. 기후비상사태를 선언해야 할 만큼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난 시대, 도시가 어떤 철학과 발상법으로 정책을 바꿔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길잡이가 되고 있습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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