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남태평양 국가들과 같이 세계적으로 중요한 생물 다양성 보호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나우루. (사진=나우루 경제 및 기후 회복력 시민권 프로그램 사무국)
[뉴스토마토 임삼진 객원기자] "시민권으로 기후변화에 맞선다."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나우루가 세계 최초로 '기후 시민권' 프로그램을 통해 첫 시민권 부여 사례를 발표했습니다. 6일(현지시간) 나우루 경제 및 기후 회복력 시민권 프로그램(Economic and Climate Resilience Citizenship Program) 사무국은 "독일 국적의 4인 가족이 기후 시민권 제도의 첫 수혜자가 됐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지난해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에서 처음 발표됐습니다. 단순한 국적 제공이 아닌 지속 가능한 지구 공동체 형성에 기여하는 시민권 모델로 세계의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계획 B' 넘어선 신개념 시민권…"나우루와 함께 미래 만들 사람만 자격"
첫 번째 시민권 승인자는 과거 유서 깊은 독일 기업을 매각한 뒤 현재 두바이에 거주 중인 가족입니다. 이들은 단순한 여권 취득 목적이 아닌 기후 대응의 일환으로 시민권을 신청했고, 나우루 정부는 4개월간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이를 승인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프로그램 CEO인 에드워드 클라크(Edward Clark)는 "철저한 신원조사와 국제 사법기관과의 연계 검토가 이뤄졌다"며 "나우루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갈 자격 있는 인물에게만 시민권을 부여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이 가족은 단순한 글로벌 이동성(mobility)이 아닌 도움이 절실한 국가에 실질적인 기여를 하겠다는 가치 기반의 결정을 내렸다"고 강조했습니다.
나우루, 왜 기후 시민권인가?
나우루 공화국의 인구는 약 1만2000명으로 면적 21㎢의 세계에서 가장 작은 공화국입니다. 기후 위기와 경제 취약성에서는 세계 5위의 고위험 국가로 꼽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나우루는 유엔 다차원 취약성 지수(Multidimensional Vulnerability Index, MVI) 상 '경제·환경적 충격에 가장 취약한 국가군'에 속합니다. 이에 따라 기후변화와 경제 위기를 동시에 돌파하려는 국가 차원의 생존 전략으로 기후 시민권 제도를 도입한 것입니다.
나우루는 기후변화 및 경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장기 개혁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사진=나우루 경제 및 기후 회복력 시민권 프로그램 사무국)
헨리앤파트너스도 동참…"시민권이 자본 아닌 책임으로"
첫 시민권 신청을 도운 글로벌 이민 전문 컨설팅 회사 헨리앤파트너스(Henley & Partners)는 "단순한 투자 이민이 아니라 기후 리스크에 직면한 작은 섬나라(SIDS)에 자본을 유입시키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며 이 사업에 참여한 자긍심을 드러냈습니다. "투자 이민 프로그램이 잘 설계되고 정직하게 관리된다면 기후 회복력과 경제 지속 가능성을 동시에 이끌 수 있다는 사례가 바로 나우루"라는 것이 헨리앤파트너스의 평가입니다.
뼈아픈 과거를 가진 나우루는 어떤 나라?
나우루는 과거 아픈 과거를 갖고 있습니다.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1990년대부터 시민권을 돈 받고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시아·중동의 부유층은 수만달러를 지불하고 나우루 시민권을 구입했고, 일부는 그 대가로 외교관 여권까지 제공받았습니다. 이러한 '여권 장사'는 곧 돈세탁과 범죄 은폐에 이용됐고, 나우루는 국제사회에서 '범죄의 관문'으로 비난받았습니다.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는 지난 2003년 나우루를 자금세탁 방지에 비협조적인 국가(Non-Cooperative Countries and Territories, NCCT)로 지정했습니다. 이는 나우루의 허술한 금융 시스템이 국제적인 돈세탁의 통로로 이용됐기 때문입니다. 한때 인광석 수출로 세계 최고 소득 수준을 자랑했던 나우루는 자원 고갈과 환경 파괴라는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이후 경제적 의존과 기후위기에 직면한 나우루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향한 체질 전환을 선언하고 나섰습니다. 바쿠에서 열린 2024년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 29)에서 기후 금융과 적응이라는 총회의 핵심 주제에 맞춰 획기적인 나우루 경제 및 기후 회복력 시민권 프로그램을 공개한 바 있습니다.
나우루는 △친환경 어업 확대 △코랄 생태 관광 개발 △신재생 에너지 기술 도입 △해수 담수화 기술 개발 △하이어 그라운드 이니셔티브(Higher Ground Initiative)라는 고지대 이주 프로젝트 등을 통해 국가 전환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이번에 첫 승인자가 나온 기후 시민권 제도도 이 같은 전환 전략의 핵심 축입니다. 시민권 신청자는 승인 이후 신청자 1명당 10만5000달러, 구성원 2~4명의 가족당 11만달러를 납부해야 합니다. 이 투자금은 식량·식수 안보 및 고지대 이주 프로젝트 기후 적응 사업에 사용된다고 나우루는 밝혔습니다. 신청자는 철저한 실사를 거치게 되며 면접에 의무로 참석해야 합니다. 승인 이후 의무 기부금을 납부하고 나우루 충성 선서에 서약하고 나면 시민권 증서와 나우루 여권을 지급받게 됩니다.
기후 시민권 확산될까?
나우루 정부는 2024년 '나우루 경제 및 기후 회복력 시민권법'을 통과시키며 공식 제도를 마련했고, 프로그램 운영을 헨리앤파트너스에 위임했습니다. 현재 추가 시민권 신청도 접수 중이며, 전 세계 각지에서 '윤리적 이중 국적'을 희망하는 신청자들의 문의가 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클라크 CEO는 "기후 시민권은 국적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작업"이라며 "이제 시민권은 단순한 문서가 아니라 어떤 지구를 함께 만들 것인가에 대한 선언"이라고 말합니다. 전문가들은 나우루를 '기후변화로 인해 21세기 최초로 사라질 수도 있는 국가'로 보고 있습니다. 위기에 처한 나우루발 기후 시민권은 '이런 일도 있구나'라는 호기심을 넘어 국제 시민권 질서에 어떤 변화를 주게 될지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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