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강석영 기자] 10·26 사태로 사형된 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재심이 시작됐습니다. 고인이 사형을 당한 지 45년 만입니다. 재심을 청구한 때로부터는 5년 만입니다. 김 전 부장 대신 피고인석에 앉은 고인의 셋째 동생 김정숙씨는 “이번 재심은 대한민국 사법부 최악의 역사를 스스로 바로잡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020년 5월26일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셋째 여동생(김정숙씨)의 장남 김성신씨가 고인의 유족을 대표해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대회의실에서 열린 김재규 형사 재심 청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씨의 오른쪽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변호를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 (사진=뉴시스)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판사 이재권)는 16일 오전 김 전 부장의 내란목적살인 등 혐의에 관한 재심 첫 공판기일을 진행했습니다. 이날 재판정엔 김 전 부장의 명예회복을 기원하는 유족과 시민들 20여명이 모여 재판을 참관했습니다.
김정숙씨는 청구인 진술에서 “1980년 당시 법정에 선 오빠는 최후진술에서 '10·26 혁명의 목표는 민주주의 회복과 국민들의 크나큰 희생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말했다”며 “오빠가 (유신정권의 폭주를) 막지 않았다면 국민 100만명 이상이 희생됐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본 재심이 우리가 기나긴 세월 가슴에 품어온 신념이 옳았단 걸 증명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김씨는 또 사법부 스스로 ‘치욕의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씨는 “10·26은 사법부에도 치욕의 역사일 것”이라며 “통치 권력 앞에서 사법부는 최소한의 절차적 정당성조차 유지하지 못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변호인단도 김 전 부장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고인이 받았던 재판은 ‘졸속 재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변호인단은 “사실상 6~7개월 만에 모든 형이 집행되는 유례없는 졸속 재판이었다”며 “결과적으로 피고인 방어권이 침해됐던 역사적 사건”일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만장일치로 피고인에게 사형이 내려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대법원 판결이) 8대 6이었다”며 “(사형을 반대한) 여섯 명 가운데 한 명은 보안사령부에 끌려가서 고문받았던 치욕의 역사가 있다”고 했습니다.
변호인단은 구체적인 항소 이유로 △1979년 10·27 비상계엄 선포가 위헌·위법하기 때문에 군 사법체계로 김 전 부장을 수사·재판한 건 위법하다는 점 △김 전 부장에게 내란 목적이 없었던 점 등을 들었습니다.
아울러 변호인단은 당시 재판에서 인정된 증거들 역시 위법하게 수집됐다고 주장했습니다. 변호인단은 “재심 결정에서도 인정된 것처럼 보안사 수사관들은 김 전 부장을 연행해 전신 구타하고 전기고문을 가하는 등 불법 가혹행위를 저질렀다”며 “다른 피고인들 역시 강요·폭행 등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말했습니다. 김 전 부장이 유죄라고 판단한 증거로 대부분 진술이 인정됐는데, 10·26 사태가 발생한 이후 상황에 대한 진술에 불과하다고도 주장했습니다.
변호인단은 “(김 전 부장의 사건은) 박정희 전 대통령 개인에 대한 살인 사건일 수 있지만, 국헌 문란 목적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회복이 목적”이라며 “신군부는 정권 탈취 의도에서 김 전 부장에게 내란 프레임을 씌우고 사건을 왜곡했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이날 검찰은 재심에 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검찰은 “지금 단계에서 항소 이유 답변을 명확하게 하기 어렵다”면서 의견을 유보했습니다. 한편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10·27 비상계엄과 당시 수사 위법성 여부를 따지기 위해 재판부가 검찰에 증인과 증거를 찾아보라고 하자, 검찰은 “찾아보겠지만 저희가 주장하는 내용이 아니라서…”라며 말을 흐렸습니다.
재판 직후 변호인단은 취재진과 만나 “검찰에서 상당히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다”며 “검찰이 진실규명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두 번째 공판기일은 오는 9월5일 진행될 예정입니다. 검찰은 입장과 증거 정리 등을 위해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김 전 부장 측은 청구인이 고령인 점을 들어 신속하 재판을 진행해달라고 요청한 상황입니다.
강석영 기자 ksy@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