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A(유럽우주국)의 임무인 LISA 패스파인더의 상상도. 우주에서 중력파를 관측하게 될 LISA 패스파인더는 태양 쪽으로 지구에서 약 150만 km 떨어진 우주 공간에서, 태양-지구 라그랑주(Lagrange) 점 1(L1)을 공전하며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사진=유럽우주국)
[뉴스토마토 서경주 객원기자] 적어도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블랙홀은 태양이나 달과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물리적 조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천체물리학자들과 이론물리학자들은 블랙홀의 실체 규명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블랙홀 연구는 당장의 실용성이 아니라, 우주의 본질과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려는 인류 지성의 도전이자 궁극의 자연법칙에 다가가는 과정입니다.
천문학에서 블랙홀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 크기로 나뉩니다. 항성 질량의 5~50배에 해당하는 ‘항성질량 블랙홀’, 수백만에서 수십억 배에 이르는 '초거대 블랙홀', 그리고 그 중간 단계인 '중간 질량 블랙홀(Intermediate-Mass Black Hole, IMBH)'이 있습니다. 이 중 IMBH의 존재는 이론적으로는 예측되었지만, 실체는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관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블랙홀 형성과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로 불리는 이 블랙홀을 향한 탐사가 최근 네 편의 논문을 통해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밴더빌트 대학 루나 랩스 연구팀 중간 질량 블랙홀의 병합 포착
이번 연구는 밴더빌트대학교 카란 자니(Karan Jani) 교수가 이끄는 루나 랩스(Lunar Labs)가 수행했습니다. 연구팀은 레이저 간섭계 중력파 관측소(Laser Interferometer Gravitational-Wave Observatory, LIGO)와 이탈리아에 있는 중력파 탐지장치인 버고(Virgo)의 세 번째 관측 기간(O3) 데이터를 재분석하여 태양 질량의 100~300배에 달하는 블랙홀이 합쳐지는 사건을 포착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관측된 중력파 중 가장 무거운 블랙홀 병합 사례입니다. 연구진은 이러한 결과를 기반으로 새로운 블랙홀 집단의 존재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이번 연구의 핵심 논문은 <천체물리학 저널 (Astrophysical Journal Letters)>에 실린 “LIGO-Virgo의 세 번째 관측 주기에서 발견된 '라이트급' 중간 질량 블랙홀 후보들의 특성(Properties of 'Lite' Intermediate-Mass Black Hole Candidates in LIGO-Virgo's Third Observing Run)”이며, 루나 랩스 소속 안잘리 옐리카르 박사와 박사과정 크리스탈 루이즈-로차가 공동 제1 저자로 참여했습니다.
우주에서 기다리는 LISA…블랙홀 병합 수년 전 감지 가능
지상 기반 중력파 검출기로는 병합 직전 단 몇 초간의 짧은 신호만을 감지할 수 있어 이 블랙홀들의 생성 기원을 밝히기엔 역부족입니다. 이에 연구팀은 ESA(유럽우주국)와 NASA가 공동으로 추진 중인 우주 기반 중력파 검출기 ‘LISA(Laser Interferometer Space Antenna)’에 주목했습니다. 2035년경 발사 예정인 LISA는 블랙홀 병합 수년 전부터 중력파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를 입증한 두 편의 추가 논문은 역시 <천체물리학 저널>에 실린 “블랙홀의 바다: 항성 기원 블랙홀 연성(連星)의 LISA 신호 특성 분석(A Sea of Black Holes: Characterizing the LISA Signature for Stellar-origin Black Hole Binaries)”과 “두 블랙홀 이야기: 리코일 킥의 다중 대역 중력파 측정(A Tale of Two Black Holes: Multiband Gravitational-wave Measurement of Recoil Kicks)”입니다. 각각 크리스탈 루이즈-로차와 전직 연구 인턴 쇼빗 란잔이 주도한 이 연구들은 LISA가 블랙홀의 병합 궤도를 추적하고, 병합 이후 블랙홀이 튕겨져 나가는 ‘리코일 킥(recoil kick)’ 현상까지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리코일 킥 현상은 블랙홀이 병합 후 속도와 방향을 바꾸며 은하 중심에서 벗어나는 현상으로, 블랙홀의 역학과 은하의 형성 및 구조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를 제공합니다.
AI로 우주 노이즈 중력파 선명하게 복원
중력파 데이터는 지진, 날씨, 장비 노이즈 등 다양한 간섭에 취약합니다. 연구팀은 AI 기술을 활용해 노이즈를 제거하고 중력파 신호를 복원하는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네 번째 논문 “매트릭스의 무오류: 노이즈 환경에서도 중력파 신호의 견고한 복원(No Glitch in the Matrix: Robust Reconstruction of Gravitational Wave Signals under Noise Artifacts)”에서는 인공지능 기반 복원 기법을 소개했습니다. 해당 기술은 자니 교수가 주도하는 ‘새로운 우주 신호 탐색을 위한 AI(AI for New Messengers)’ 프로그램의 일환이며, 밴더빌트 데이터 과학 연구소와의 협업을 통해 더욱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 AI 모델은 기존 방식보다 더욱 빠르고 정밀하게 잡음을 걸러내며, 중력파 신호를 안정적으로 복원할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루이즈-로차는 “이번 연구가 지상과 우주를 아우르는 중력파 탐사의 주요 관측 대상으로 IMBH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더 나아가 연구팀은 중력파 탐사의 새로운 프런티어로 ‘달’을 지목했습니다. 옐리카르 박사는 “달 표면에서는 지상보다 낮은 주파수의 중력파를 감지할 수 있어, 블랙홀이 어떤 환경에서 형성되고 진화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달은 지진이나 기상 등의 간섭이 거의 없어, 중력파 관측에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합니다.
달에서의 중력파 탐지, 우주 기원을 밝히는 새로운 가능성
자니 교수는 앞으로 NASA의 후원 하에 전미과학한림원(NAS)에서 진행하는 달 탐사 전략 연구에도 참여할 예정입니다. 그는 해당 프로젝트에서 태양물리학, 우주기상, 기초 물리 등 다양한 분야의 달 탐사 과제를 맡아 인류가 우주의 기원을 달 위에서 밝혀내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는 “지금은 블랙홀 연구뿐 아니라 과학의 다양한 경계가 우주와 달 탐사를 통해 융합되는 전례 없는 순간”이라며 “이번 연구가 블랙홀과 중력파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한층 심화시키며, 인류의 우주 이해도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블랙홀은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어 직접 볼 수 없는 천체입니다. 그러나 블랙홀 두 개가 서로 충돌하거나 병합할 때,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중력파 형태로 우주에 퍼져나갑니다. 이 중력파는 블랙홀이 실제로 존재하고 활동하고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입니다.
서경주 객원기자 kjsuh57@naver.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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