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16-39-113’ 김재규 재판의 소환
5.18 혼란 속 확정판결 나흘 만에 처형당해
1,2심 총알 재판에도 113일 숙고한 대법원
‘퀵 서비스’ 대법원에 던지는 역사적 교훈
2025-05-08 06:00:00 2025-05-08 06:00:00
대선을 한달 앞두고 45년 전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재판이 소환됐다. 헌법연구관 출신인 이석연 더불어민주당 공동선대위원장의 성명을 통해서다. 대법원이 이재명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한 사안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그는 김재규 부장이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을 받는 데 113일 걸린 역사의 한 장면을 환기시켰다. 그러면서 2025년의 대법원이 이재명 후보에 대한 판단을 항소심 판결 이후 단 36일 만에 내놓은 부분을 비판했다.
 
김재규 전 부장의 재판 과정은 드라마틱했다. 그는 1979년 10·26 사건으로 체포되고 첫 공판 후 16일 만인 12월 20일에 1심 선고를 받는다. 2심 역시 39일(이듬해 1월 28일)밖에 안 걸렸다. 전두환 신군부는 ‘유신의 심장’을 쏜 김 전 부장이 세간에 영웅으로 부각되는 상황을 막으려 했다. 1심, 2심 재판부는 이런 권력의 욕구에 순응했다.
 
필자는 한 방송사의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김재규 재판 과정을 탐사한 적이 있다. 취재를 통해 ‘재판이 개판’이 된 정황을 수집할 수 있었다. 신군부는 법정 발언을 몰래 녹음했으며, 재판 도중 수시로 재판부에 쪽지를 전달했다. 피고인 김재규에게 가혹행위를 한 정황도 드러났다. 부마 항쟁 같은 민주화운동이 10.26 저격의 도화선이 됐다는 피고인의 증언은 공식 기록에서 빠지기도 했다. 신군부가 대법원에도 신속한 상고 기각을 요구한 정황도 나왔다.
 
하지만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신군부의 일정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김재규의 행위는 내란 목적 살인이 아닌 단순 살인이며, 적어도 내란죄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서슬이 퍼런 총구 앞에서도 법관들은 논의를 이어갔다. 2심 판결 후 113일만인 5월 20일 상고를 기각하고 김재규의 사형을 확정하기는 했다. 하지만 여섯 명의 판사는 내란 목적 살인으로 볼 수 없다는 소수의견을 냈다.
 
김재규 전 부장은 확정 판결 나흘 만에 형장으로 향한다. 5.18 민주화운동이 한창 진행될 때였다. 신군부가 정치적 부담을 덜어낸 것이다. 확정 판결 이후 불과 1년 사이에 소수의견을 낸 판사들은 모두 법정을 떠나야 한다. 하지만 113일 간의 심리와 소수의견은 역사 앞에 숙고의 흔적을 남겼다.
 
얼마 전 김재규 사건에 대한 재심이 결정됐다. 내란 목적 살인이라고 단정하기 어렵고, 재판이 강압적 분위기에서 진행됐으며, 피고인에 대한 가혹행위 정황이 발견된 점 등이 재심의 사유였다. 숙고의 귀환이었다.
 
이석연 선대위원장은 “당시 계엄 하에서도, 더구나 내란 목적 살인으로 기소된 피고인에 대해서도 대법원이 100일 넘게 심리를 진행했다”고 언급했다. 그렇다면 2025년의 대법원은 무슨 이유로 선두를 달리는 대선 후보의 심리를 서둘렀을까. 1980년처럼 총칼과 계엄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무엇이 대법원장과 다수의 대법관을 ‘퀵 서비스’로 만들었을까.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선포만큼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다.
 
이규연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 겸 미래학회 회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지난 뉴스레터 보기 구독하기
관련기사
0/300

뉴스리듬

    이 시간 주요 뉴스

      함께 볼만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