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3년 반쯤 되었을 때 비서실에서 사회조정비서관을 맡고 있던 필자에게 또 숙제를 내셨습니다. 일 많이 하는 대통령을 모시는 비서관들은 잠자는 시간 빼고는 늘 일 속에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대통령 지시의 요지는 국토균형발전위원회의 '살고싶은 도시' 주제를 시민사회 영역에서, 일회성 행사가 아닌 지속가능한 운동으로 하는 방안을 찾아서 집행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네트워크를 가동해 의견을 받아봤지만 눈에 확 띄는 아이디어는 좀처럼 나오질 않았는데요. 당시는 운동권 출신들이 시민사회의 주류를 이루면서 통일운동, 환경운동, 투명성운동 등 분야에서 주장도 많고 과감한 액션도 마다하지 않던 시절이어서 '살고싶은 도시'라는 다소 이질적인 테마가 시민사회 영역으로 자리잡기는 어려운 여건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런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아예 없다고 보면 될 정도였습니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살고싶은 도시'라는 네이밍도 대통령께서 직접 했던 것 같습니다. 시쳇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고역과 곤혹감에 괴로워하고 있는데,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부속실의 채근까지 더해져 스트레스가 폭발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숙제를 늘 함께 고민해주는 가까운 선배로부터 저녁 한 끼 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선배는 고민하고 있는 일의 방향을 정치분야로 틀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맨땅에 헤딩' 해서는 듣도보도 못한 '살고싶은 도시'를 찾을 수 없으니, 상상의 영역에 있는 그것을 현실에서 구현할 지방자체단체장들의 힘을 빌려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단체장들을 대상으로 공약(公約) 경진대회를 계속하면 좋은 공약들이 다듬어질 것이고, 그걸 통해 대통령이 원했던 '시민사회운동 확산'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이라고 반갑게 생각했고, 대통령비서실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연구용역을 발주했습니다. 또 하나 획기적이었던 것은 연구용역에 참가했던 인물들 중 독일에서 공부한 후배가 '코뮤니스트 매니페스토'(Communist Manifesto)를 차용하자는 제안을 했는데요. 그리하여 나온 것이 '좋은 공약 운동', '매니페스토 운동'이었습니다.
뒤늦게 오래 전 일을 거론하는 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식으로 한국의 '매니페스토 운동' 역사를 실록에 남기고자 하는 뜻도 있지만, 그보다는 '좋은 공약' 위에 '좋은 법(法)'이 있다는 사실을 얘기하고 싶어서입니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옛날옛적 법'이 현실에 대못질을 함으로써 시대 변화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탄력성 없게 되어버렸거나, 아예 사문화 되는 법이 수두룩합니다. 법이 현실의 발전을 가로막는 일이 부지기수이며, 이는 서둘러 바로잡아야 합니다.
국회의원을 새로 뽑는 총선거가 내년 4월에 있습니다. 국회의원의 본령은 '입법과 예산'입니다. 예산은 좋은 공약과 함께하고 입법은 좋은 법개정과 함께 하는 것이 옳습니다. 앞서 언급한 그 이후로 20년 가까이 흐르면서 '좋은 공약 매니페스토운동'을 하는 민간단체는 수 없이 많아졌습니다.
훌륭한 성과를 낸 것인데, 따지고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업적입니다. 어젯밤 꿈에 어른(노 전 대통령)께서 숙제를 또 주셨습니다. '좋은 공약운동은 잘하고 있으니 그 위에 있는 좋은 법 개정 운동을 제대로 해봐라!'. 그래서 내년에는 '좋은 법 개정 운동본부'를 출범시키려고 합니다. 필자가 해 본 일이라 잘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충만합니다.
정재호 전 국회의원·전 IBK기업은행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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