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5일(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UAE) 파병중인 아크부대를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뉴스토마토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정말 이래서는 안 되는데…”
평생 중동을 연구해온, 유명한 중동 정치 전문가가 지난 16일 페이스북에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평소 유머러스하고 재기 넘치는 글을 쓰는 인사인데, 글은 딱 한 줄 뿐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났나 했더니, 윤석열 대통령이 아랍에미리트(UAE) 주둔 아크부대를 방문해 “우리의 형제국가인 UAE의 안보는 바로 우리의 안보”라면서 “아랍에미리트의 적, 가장 위협적인 국가는 이란”이라고 한 말이 사달이 난 겁니다.
잘 알려진 대로, 서울 강남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왕복 10차선 대로가 이란 수도에서 따온 테헤란로입니다. 한국과 이란은 1962년에 수교했고, 1977년에 서울시와 테헤란시가 자매결연하면서 서울에는 테헤란로, 테헤란에는 서울로라는 도로명이 생겨났습니다. 서울로의 남쪽 끝에는 '서울공원'이라는 한글 간판이 붙은 공원도 있고요.
수교 이후 처음으로 2016년 5월에 박근혜 대통령이 이란을 국빈방문해, 이란 히잡의 하나인 루싸리를 썼습니다. 뻥튀기 논란도 있었지만, 당시 청와대는 ‘역대 최대 42조원 경제외교 성과 창출’이라고 자랑했습니다.
이란이 한국의 적?
그런데 윤 대통령이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뜬금없이 “UAE의 적은 이란”이라고 한 겁니다. 한국과 UAE를 “형제국”이라고까지 했으니, “이란은 한국의 적”이라는 논리가 가능하고, 아크부대가 이란을 겨냥해 주둔하고 있는 거냐는 해석이 나올 수 있는 발언입니다.
‘이란이 UAE의 적’이기는 한 걸까요? 두 나라는 수니파-시아파 갈등으로 2006년에는 외교관계 수준을 대리대사(공사)급으로 낮췄지만, 지난해 대사를 파견하는 등 회복 국면에 들어갔고, UAE최대 도시 두바이에만 이란인 60만명이 거주하고 있답니다.
가뜩이나 미국의 대이란 제재 때문에 우리가 이란에 70억 달러(약 8조 6600억원)나 되는 석유대금을 지급하지 않고 있는데, 이란의 해외동결자산 가운데 최대 규모라, 이란이 입을 바짝 내밀고 있는 지경입니다. 여기에 더해 큰 약점을 또 하나 잡힌 셈입니다. 석유 대금건은 미국 핑계라도 대지, 이 건은 우리 스스로 만든 약점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임을 자랑하는 이란이 발끈하지 않을리 있겠습니까? “한국 대통령의 발언은 이란과 UAE를 포함한 페르시아만 연안 국가들의 역사적이고 우호적 관계와 이들 사이에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긍정적인 발전에 대해 전적으로 모르고 있다(totally unaware)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윤 대통령을 직접 겨녕해 ‘완전히 무지’하다는, 우리로서는 참으로 낯 뜨거운 모욕이고 보통 외교관계에서는 쓸 수 없는 고강도 비난을 외교부 홈페이지에 올려놨습니다. 이어서 이란 외무부가 주이란 한국대사를 초치해 항의하면서 “즉각적인 설명과 입장 정정이 필요하다”고 요구했습니다.
지난 2016년 5월, 2박 4일 일정으로 이란을 국빈 방문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2일 오전(현지시간) 사드아바드 좀후리궁에서 하산 로하니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앞서 사전환담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더 큰 문제는 무지보다 이분법
윤 대통령의 ‘무지’보다 더 크고 위험한 문제는, 항상 적과 아를 가르는 이분법식 사고방식입니다. 무지는 공부하면 되지만 철학이나 사고체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종북 주사파는 반국가세력이고 반헌법 세력이다. 이들과는 협치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협치’라는 용어를 통해 이 발언의 대상이 민주당 등 야당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야당을 ‘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선 후보 때 “한국 국민들, 특히 청년들 대부분은 중국을 싫어한다”는 발언은, 윤 대통령이 이분법적 단순논리예 빠져 있음을 보여준 예고였습니다. 대통령 취임 뒤에는 외교에 자유민주주의, 인권, 법치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가치외교, 이념외교를 천명했습니다. 미국 등 서방 중심 편향, 진영 외교에 선 겁니다. 과거사 문제 해결에 퇴행하고 있는 일본이 향후 5년간 방위비를 두 배로 늘리는 대대적인 군비 증강에 나서고, 유사시 한반도 진출 가능성을 시사해도 수수방관, 오불관언입니다.
이러니, 아들 부시 대통령이 북한, 이라크과 함께 ‘악의 축’이라고 규정한 이란을 윤 대통령 역시 거침없이 ‘적’이라 부를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라는 말은 국제정치에서 상식 중의 상식입니다. 무정부,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각국은 생존과 이익을 위해 어떤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외교무대에서 제3국을 거론할 수 있는 국가는 지구상에 단 한 나라, 미국뿐이고, 다른 나라들은 국익을 위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식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국내 갈등에 비해 국가 간 갈등은 훨씬 피해가 크고 회복하기도 어렵습니다.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란은 이번에 석유대금 문제를 거론하면서 ”양국 관계를 재검토할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윤 대통령의 외교, 정말 계속 이래서는 안 됩니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