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란 단어
. 날 붙잡아 준 적이 있었다
. 두 개의 음절로 이어진 이 단어가 가진 힘은 실로 엄청났다
. 내 삶이 끔찍한 나락으로 떨어질 때마다 누군가 내민 손을 잡고 함께 나락을 헤쳐 나올 수 있었다
. 군 시절 여자친구와의 이별에 탈영을 고민했던 시기
, 사회생활을 하며 직장 상사의 괴롭힘에 힘들었던 시기
, 나는 늘 혼자인 것 같았지만 사실 혼자는 아니었다
. 내 곁엔
‘함께
’하는 누군가가 있었다
. 그렇게 난
‘혼자
’가 아닌
‘함께
’의 힘에 기대 지금까지 인생을 잘 살아왔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지천명이 멀지 않은 나이다. 아직도 ‘함께’란 노래를 들으면 묘한 힘을 얻는 난, ‘함께’란 단어가 힘을 잃어가는 요즘 현실이 안타깝다.
지난 4월 서울 한 지하철역에서 지체장애인들이 휠체어에서 내려 출근길 지하철 바닥을 기었다. 언론은 이를 ‘오체투지’라 불렀다. 허울 좋은 기사적 포장이다. 그저 ‘생존투지’였다. ‘함께’ 좀 살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차갑다. 지금도 온라인 동영상 댓글에는 장애인 비하가 수두룩하다. 방법론 문제를 거론하며 장애 혐오도 서슴지 않는다. 그저 ‘함께’ 살자는 건데 그들 목소리는 방법론 비난 속에 묻혀 사라졌다.
앞선 4월 19일 청와대 인근 공터. 556명 발달장애인 부모들이 모여 삭발했다. 발달장애인 24시간 돌봄체계 마련 촉구 자리였다. “발달장애인도 살던 마을에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 약속. 사실 이전에도 그랬고, 그 이전에도 그랬고 그 그 이전에도 그랬다. 모두 말로는 발달장애인도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하겠단다. 그리고 기다려 달란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1년? 10년? 50년? 100년? 누군 간 이를 두고 ‘잔인한 장난’이라 했다. 기다림에 지쳐 쓰러질 때 숨 넘어가지 않을 정도의 단물 한 방울 떨어트리듯 약자의 간절함을 이용하는 잔인한 장난. 그 장난 속에 ‘함께’는 당연히 없다.
며칠 전 주말이다. 삭발을 마친 뒤 단식농성을 이어가는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천막단식 농성장에 응원 차 방문했다. 온 가족이 함께 출동했다. 농성장은 경복궁 역사 안. 삭발한 부모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 발달장애인 아들이 화장실에 가고 싶단 신호를 보냈다. 아들과 역사 내 화장실로 가던 중 봉변을 당했다. 아들은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 구축’이라 적힌 조끼를 입고 있었다. ‘장애인’이란 글자에 등산복 차림의 만취 승객이 욕을 퍼부었다.
고작 14살 발달장애인 아들이 비장애인 만취 남성에게 욕을 먹고 있다. 스쳐 지나는 누구도 취객을 말리지 않았다. 모두가 힐끔거리며 그 상황을 구경만 했다. 조끼가 문제 였을까. 장애인이 문제 였을까. 장애인 시위는 이제 욕설이 당연해진 혐오의 대상일 뿐일까.
참담했다. 왜 시위하는가에 대해 아무도 보려 하지 않는 현실이다. 함께 살자는 것뿐이다. 특별대우를 바라지 않는다. 그냥 당신이 살 듯 그들도 그렇게 그냥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게 해달란 거다. 함께 살자는 목소리는 여전히 허공에 흩어지는 중이다.
그럼에도 ‘함께’. 참 좋은 단어다. 그렇기에 여전히 그 단어의 힘을 믿고 싶다. 차가운 현실 앞에 또 속고 속을지라도 여전히 나는 ‘함께’란 단어를 손에서 놓고 싶지 않다. 여전히 그럴 수 없다. 영화 ‘말아톤’의 엄마가 ‘아이보다 딱 하루만 더 살고 싶다’는 소원이 이젠 정말 영화 속 대사로만 존재했으면 한다. ‘함께’가 그걸 이뤄줄 수 있을까. 그러길 소원하고 바란다. 부디. 그리고 제발.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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