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대중음악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알은 하나의 세계고, 태어나려는 자는 그 세계를 깨뜨려야만 한다. 록 밴드의 보컬이자 프론트맨을 선언한 백예린은 지금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고 있다.
‘Square’,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로 한국 대중음악의 새 지평을 열었던 백예린이 밴드 ‘더 발룬티어스’(The Volunteers, TVT)로 돌아왔다. 지난달 27일 발매된 셀프타이틀 데뷔 앨범은 ‘록의 심장’ 영국 런던 한복판에서 울려 퍼져도 딱히 이질감이 없을 정도다.
텅 빈 공간에 드럼을 크게 쿵쿵 찍고 시작하는 첫 곡 ‘Violet’부터가 록적인 선언이다. 이내 지글거리는 기타리프 덩어리들이 가세하며 앨범 전체를 송두리째 휘감고 뒤흔든다.
최근 밴드가 직접 꾸린 스튜디오 ‘TVT 클럽’에서 ‘더 발룬티어스’ 네 멤버, 백예린(보컬·기타), 고형석(베이스·프로듀서), Jonny(기타), 김치헌(드럼)을 만났다. 오아시스와 울프앨리스를 듣고 꿈꾸던 이들의 언어는 어느새 그들이 바라던 자유와 닿아있었다. 사회 시스템이 정해 놓은 질서에 물음표를 던진 뒤, 새로운 세계를 향한 날개를 펴고 있었다.
더발룬티어스. 백예린(왼쪽부터), 고형석, Jonny, 김치헌. 사진/블루바이닐
○ "솔직한 가사 아니면 제가 프론트맨일 이유 없어요"
-초창기 쓴 곡들의 가사를 보다보면 ‘사회를 향한 분노’가 느껴져요. 그 당시 예린님의 분노를 일으킨,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던 고민들은 무엇이었나요.
예린: 어른에 대한 반항일 수도 있고,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가 정해놓은 시스템이 제 자유로움에서 나오는 창작을 옥죈다고 생각했었어요. 이미 뭔가 정답이 있고, 그것에 맞지 않게 행동하거나, 창작을 하면 틀렸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거든요. ‘내가 예외를 만들어야지’ 생각 했었고.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Violet’의 경우 시스템에 대해서, 묵인하며 살아가는 얘기를 다뤘어요. ‘Nicer’는 저도 모르게 ‘무조건 친절해야만 한다’, ‘착한 아이로 지내야한다’ 그런 강박을 저한테 씌었던 것들이 싫어서 썼던 것 같아요.
-몇몇 수록 곡의 가사는 가상의 영화스토리를 상상하고 썼다고 봤습니다. ‘Radio(미국 남부 시골 교회가 배경, 라디오를 유일한 즐거움으로 생각하는 아이는 도시에 나가 이를 전파한다)’, ‘Let me go!(미국 로스앤젤레스 배경, 컨버터블을 타고 미국 투어를 도는 밴드의 여정을 그린다)’, ‘Summer(영화 ‘콜미바이유어네임’의 배경, 색감에서 착안했다)’. 상상을 가사로 끄집어 낼 때, 실제 경험과 상상의 밸런스는 어떤 비율로 조율 하시나요.
예린: 글 쓰는 것을 어릴 때부터 너무 좋아했어요. 언젠가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거기에 맞는 곡도 써보고 싶어요. 곡을 쓸 때는 제가 특정 풍경이나 장면을 생각해두고 거기에 맞게 상상하고 흘러가는 식이에요. 실제 경험과 상상의 밸런스는, 제가 그 화자가 돼 써야 하니까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쓴 것은 맞지만, 결과적으로 저라면 ‘이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60~70퍼센트 정도 그렇게 생각하고 썼던 것 같아요.
-‘PINKTOP’, ‘Let me go!’, ‘Time to fight back in my way’, ‘Medicine’는 이번에 수록된 신곡입니다. 조금 더 넓은 세계를 보려는 자유분방함 같은 정서가 두드러져요.
예린: 예전에 썼던 곡들은 제가 스스로를 많이 가뒀던 것 같아요. ‘이렇게 하면 안돼, 저렇게 하면 안돼.’ 그 바깥세상으로 나올 생각을 잘 안했었거든요. 본격 밴드를 하면서 개인적인 제 삶의 애티튜드가 바뀐 것 같아요. 보이는 것들이나 들리는 것들을 많이 신경을 안 쓰려고도 하고 있고. 최근 쓴 신곡들은 적어도 과거에 비해 조금 달라진 제 모습의 이야기 맞아요. 저와 같이 마음이 아팠던 사람들이 있다면 그걸 깨고 나와도 괜찮다는, 조금은 희망적이고 거친 메시지를 담고 싶었어요.
-그런 메시지를 가장 잘 표현한 곡은 무엇인가요.
예린: ‘PINKTOP’ 하고 ‘Medicine’. ‘PINKTOP’은 조금 더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에요. 사람의 행색이나 겉모습 만으로 좋지 않게 보는 것에 관한 이야기죠. 타투 같은 거. 어떻게 보면 사람에 대한 편견인데, 그걸 깨고 싶어서 썼어요. ‘Medicine’은 대중 앞에 서는 사람으로서 느낀 것에 관한 이야기에요. 어떻게 보면 이유 있는 질타도 있을 테고 이유 없는 질타도 있을 텐데,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어요. 그럼에도 결국 난 내 소중한 사람들한테 ‘약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Social Anxiety Disorder’라는 말은 ‘사회 불안 장애’인데, 이런 주제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된 계기 같은 게 있으셨나요.
예린: 방송에 나가고 알려지면서 어디를 가서 놀고 밥 먹고 하는 게 어느 순간부터 불편해지더라고요. 식당을 갔다가 누군가 제 얘기를 건너편에서 하는 걸 실제로 들은 적도 많았고. 제 노래 나올 때 불안해지더라고요. 근데 사실 악의가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를 알아봐주고 하는 것이 감사한 일이지만, 저는 한편으로 개인적인 삶이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에요. 어떻게 보면 평범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싶은 의지가 어릴 때부터 컸어요. 이런 개인적인 얘기는 밴드 안에서만 할 수 있어요. 최대한 솔직하게 가사를 썼어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프론트맨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더발룬티어스 백예린. 사진/블루바이닐
○ 영국 글래스톤베리, 우리도 반드시 갈 거라서요!
-코로나 19 여파로 삶에 어떤 변화들이 생기셨는지요. 그 변화가 음악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리고 팬데믹이 끝나면 어떤 무대에 서보고 싶으신지.
예린: 대면 형식의 공연을 오랜 기간 못했어요. 앨범 작업에 쏟아 부은 에너지를 돌려받는 시간이 공연인데 그게 없어져버렸으니.. 앨범을 내도 그냥 흘러가고 있는 느낌이라 아쉬워요.
형석: 오히려 좋은 점이라 하면 앨범 진척이 빠르다는 것. 보통 저는 곡을 쓸 때 장기전으로 가지 않는 편입니다. 어떤 곡은 데모를 만드는 데 하루도 안 걸리고 보통 길어도 일주일을 넘기지 않아요. 데모 작업 이후로는 녹음 3주빡, 믹스 3주 빡. 팬데믹 이후로는 물리적인 작업 총량이 늘어나서 더 앨범 작업이 수월했어요.
예린: 콘서트는 제일 심플한 구성에서 먼저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계속 앨범을 내보면서 저희 아이덴티티가 확실해 졌을 때 확실한 무대 장치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해요.
형석: 페스티벌 무대에 잘 어울릴 음악이죠. 이것저것 같이 즐길 수 있는 형태의 공연이나 그림이 밴드랑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 재미있을 것 같아요. 기회가 되면 영국 글래스톤베리를 꼭 가보고 싶습니다. 록 시장을 잘 이해하는 문화가 있다고 생각하고요.
예린: 올해 울프앨리스 무대 인상적이었어요. 근데 우리도 반드시 갈 거라서 엄청 부럽진 않았습니다.
더발룬티어스 고형석. 사진/블루바이닐
-최근에는 한국의 대중음악이 전부 ‘K팝’이란 카테고리에 묶여 소개되고 있어요. 해외시장에서 더발룬티어스 음악이 어떤 식으로 소개가 됐으면 하는 바람 같은 게 있으실지 궁금합니다.
형석: 굳이 따지자면 록 밴드라고 소개되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해요. 영국의 록 음악도 우리나라에 소개할 때 ‘영국의 록’ 이렇게 소개하진 않잖아요. 일단 K가 들어가면 소비하는 시장이 있다고 생각하고 굳이 저희를 그 단어에 밀어넣고 싶진 않아요. 가능하다면 록 밴드라는 소개만으로도 사람들한테 들려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The Volunteers’의 음악은 정말 해외 팝이나 록을 듣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최근 한국 음악신에도 록을 들고 대차게 나오는 현상이 관찰되고 있는데, 한국의 록이 K라는 카테고리에 묶이지 않고 해외로 퍼져가는 시일이 더 앞당겨지지 않을까 생각이 들더군요. ‘The Volunteers’를 필두로.
예린: 불을 지피는 건 아니더라도 불씨 정도 됐으면 좋겠어요!
형석: 옮겨 탈 수 있는 불쏘시개 정도? 좋은 영향이 될 수 있으면 좋은 거죠. 록 밴드의 사명, 미래 그런 거창하고 웅대한 뜻을 품기보다는 그저 록 밴드를 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이라는 것이 좋아요. 그게 좋은 영향이 될 수 있다면 2배로 좋은 거고요.
-얼터너티브 록을 중심으로 개러지, 드림 팝, 모던 록 계열까지 아우르는 앨범은 다음 음반을 기대하게 합니다. 리얼 악기 편성의 뼈대를 유지하실 것 같은가요. 공연 계획도 있는지 소개해주세요.
Jonny: 꼭 리얼 악기로 ‘이런 음악만 할거야’ 하고 정해둔 것은 없습니다. 가상악기로 음악을 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올 여름 7월 중순 쯤 계획인 공연 연습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더발룬티어스 Jonny. 사진/블루바이닐
○ 우리가 ‘들끓는’ 할게, 예린이가 ‘청춘’!
-2018년에 만든 데모를 비롯, 각기 다른 시기에 쓴 곡들이라 앨범의 일관된 메시지는 없다고 하셨지만, 그럼에도 관통하는 공통의 정서나 느낌, 분위기, 색감이란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예린: 사회에 대한 메시지, 그리고 내 마음이 하고 싶은 말. 그거인 것 같아요. 심오하게 다가가면 심오해지지만 한편으론 가볍게도 생각해볼 수 있는 가사들이에요. 제가 ‘록잘알’은 아니지만 해외 음악을 들어봐도 노골적인 가사도 많고 사회에 대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게 풀어가는 게 록의 정서인 것 같아요. 그걸 담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다른 데서 못하는 거 자유롭게 하니까.
예린: 근데.. 자꾸 대답하려니 머릿속에 웃긴 것만 생각나네요. (웃음) 들끓는... 청춘?
멤버들: 그럼 우리가 ‘들끓는’ 할게. 예린이가 청춘!
모두: 하하하.
-가사 쓰듯 영화적인 상상으로 대답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이번 앨범을 ‘여행지’에 빗댄다면, 듣는 사람들에게 어떤 여행지면 좋을지,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해본다면 무엇일까요.
예린: 배낭여행으로 할게요. 돈이 좀 생기면 차타고 멋있게 드라이브도 하고 근데 또 힘들 때는 가방 들고 “배고파” 하며 다니고. 잘 곳 없어서 24시간 카페 들어가 따뜻한 것도 마시고. 젊어서 할 수 있는 여행들. 그런 게 생각나요. 미국이든 영국이든 배경은 상관없을 것 같아요.
형석: 저는 우리 사운드가 도시적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근데 또 일정 부분은 그 근교의 전원 풍경도 떠올라요. 유럽 가보면 그런 도시들이 많잖아요. 도심에서 20분만 나가도 자연친화적인.
예린: 송도 같은 느낌 아닌가. 여주나?
형석: 소박하지만 뭐 그런 곳들도 좋을 것 같고. ‘Radio’ 같은 노래가 그런 것 같고.
Jonny: 도심 조금만 벗어나면 전원 풍경이 펼쳐지는...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 같이 갔던 여행들이 대체로 그랬던 것 같아요.
치헌: 팬데믹이니까, 현실적으로 차 안 막힐 때 가는 강원도 양양을 생각했어요. 고속도로 휴게소도 들리고.
예린: ‘소떡소떡’ 먹어주고?
치헌: 그렇지. 그리고는 볼륨을 서서히 높이는 거죠. 도착 50분 전!
더발룬티어스 김치헌. 사진/블루바이닐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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