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종용 선임기자] 금융당국 내부에서 은행권의 기업대출 확대를 위한 위험가중치 규제 완화에 대해 부정적 기류가 감지됩니다. 미국 상호관세가 유예되고 협상 국면에 돌입한 데다 원달러 환율이 안정 국면에 들어선 만큼 도입 사유가 부족하다는 견해입니다. 규제를 완화한다고 해서 은행이 중소기업 대출을 적극적으로 늘리겠느냐는 의구심도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관세협상·환율추이 지켜봐야"
22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위험가중자산(RWA) 규제 완화 등 은행권 건의 사항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RWA 규제를 완화하면 기업에 대한 자금 공급을 늘릴 수 있다는 게 은행 측 주장입니다. 상호관세, 고환율 등의 영향으로 어려움을 겪는 기업에 자금 공급을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해달라는 것입니다.
금융위 관계자는 "통상 현안 관련 범정부 TF가 꾸려진 이후 부처별로 대응 방향을 점검하는 차원에서 전반적인 규제를 살펴보고 있다"며 "아직까지 시행 일정이나 적용 기한 등을 정해두고 논의를 진행 중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관계자는 "원달러 환율이 급격하게 오르거나 관세로 인한 대응 필요성이 커질 경우 적용에 속도가 붙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상황을 지켜봐야 할 때"라며 "갑작스러운 코로나 충격으로 예대율 규제 등을 즉각적으로 완화한 것과는 다른 상황"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미국이 한국에 적용하기로 한 상호관세율은 25%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별 상호관세를 유예한 상태입니다. 관세 협상 우선순위에는 일본·인도·호주·영국과 더불어 한국이 포함됐는데, 이번 주 한미 교섭 협상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한미 관세 협상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이끌어낼 경우 원화 가치도 오를 것이란 기대감이 있습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1400원대에 들어선 환율은 미국의 상호관세가 발효된 지난 9일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6년여 만에 가장 높은 1484.1원까지 뛰었습니다. 이후 상호관세 유예 등으로 다시 1420원대까지 내려온 상태입니다.
그간 강달러 기조 속에 상호관세 이슈까지 겹치자 은행들은 RWA 관리에 어려움을 토로해왔습니다. 강달러가 지속되고 원달러 환율이 높을수록 은행들의 RWA가 높아집니다. RWA 상승은 은행의 건전성과 배당 여력을 나타내는 보통주자본(CET1)비율 하락으로 이어집니다. CET1비율은 보통주자본을 RWA로 나눠 산출하는데 RWA가 클수록 CET1는 낮아집니다.
미국 상호관세 정책과 강달러 기조에 경제 전반위 위기가 커지면서 은행 자금 공급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 2일(현지시간) 백악관 경내 로즈가든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별 상호관세를 발표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RWA 완화, 중기대출로 이어질지 미지수
은행들은 CET1을 관리하느라 기업대출 공급에 적극 나서기 어렵다고 얘기합니다. 같은 액수의 대출이라도 기업대출은 가계대출보다 RWA를 집계할 때 적용하는 위험가중치가 높아 CET1을 낮추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지난해 말 기준 은행권의 평균 위험가중치는 중소기업 대출이 가계 주택담보대출보다 3배 이상 높았습니다.
은행들이 RWA 규제 완화를 요구하는 또 다른 이유는 기업가치 제고(밸류업) 정책 때문입니다. 은행권 금융지주사들은 CET1비율을 높여 총주주환원율을 확대하는 밸류업 계획을 발표한 상태입니다. CET1비율이 악화하면 밸류업 계획에도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RWA 관리가 가장 중요합니다.
은행권은 관세 유예 기간이 생겼지만 안심할 단계는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 유예 기간이 더 짧아질 수도, 길어질 수도 있는 것"이라며 "관세정책에 대한 불확실성이 여전한 데다 기본관세 10% 적용은 바뀌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더 안 좋을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은행들이 위험가중치 규제 완화로 재무 여력을 확보하더라도 중소기업 대출을 적극적으로 늘릴 것인지도 불투명합니다. 지난해 말 고환율 속에서 해외 자산 포지션 등 환율 변동에 따른 리스크를 위험가중자산 산출에서 제외하도록 규제를 완화했지만, 은행들은 중소·기술기업 대출을 오히려 줄였습니다.
한국은행의 3월 금융시장 동향에 따르면 은행 기업대출잔액은 1324조3000억원으로 전달보다 2조1000억원 줄었습니다. 3월 기준 기업대출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은 지난 2005년 3월 1조2000억원 감소한 이후 처음입니다. 대기업 대출잔액이 7000억원 줄었고, 중소기업은 1조4000억원이나 감소했습니다.
은행들은 성장 잠재력을 가진 기술기업에 대한 신용 공급도 줄였습니다. 은행연합회 기술금융 종합상황판에 따르면 지난 2월 말 기준 KB국민·신한·하나·우리 등 4대 은행의 기술신용대출잔액은 136조4704억원으로 지난해 12월 139조2931억원에 비해 2조8227억원 감소했습니다. 국책·지방은행을 포함한 은행권 전체 기술신용대출잔액도 같은 기간 302조7538억원에서 302조6185억원으로 줄었습니다.
지난 3월 은행권 기업대출이 중소기업 대출을 중심으로 크게 하락했다. 3월 기준으로는 20년 만에 첫 감소다. 사진은 서울 시내 한 은행 대출창구 모습. (사진=뉴시스)
이종용 선임기자 yong@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의중 금융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