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5번째다. 지난 5월부터 이달 17일까지 발생한 에너지저장장치(ESS) 화재 사고 말이다. 정부는 부랴부랴 긴급조치에 나섰다. 뒷북논란과 눈치보기 등 지적이 나오지만 어쨌든 사태의 심각성은 인식했다.
ESS는 전기를 잘 안 쓰는 낮에 전력을 저장했다가 밤에 분산·방출하는 장치다. 단지 여러 전력설비 가운데 하나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부는 ESS 보급을 장려하고 있다. 기업도 ESS 사업화에 발 벗고 나섰다. ESS가 미래형 전력망으로 불리는 스마트그리드의 핵심 장비이기 때문이다.
스마트그리드는 전기의 생산과 운반·소비 과정에 정보통신기술(ICT)을 접목, 전력 수급의 상호작용을 늘리고 효율성을 극대화한 것이다. 불과 몇해 전만 해도 전력 수급에 실패, 툭하면 '블랙아웃'이 터졌다. 똑똑한 전력망을 만들어 탄력적으로 수급을 조절하자는 아이디어를 구현한 게 스마트그리드다. 여기에서는 전력을 저장하고 방출하는 ESS가 특히 중요하다. ESS를 '스마트그리드의 심장'이라고까지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다.
한국은 지하자원이 변변치 않다. 전기는 부족하다. 그래서 스마트그리드는 장밋빛 미래였다. 정부는 2010년대 이후 스마트그리드 구현에 중점을 뒀다. 기업도 미래 먹거리로 여겼다. 제주도와 일부 도서지역에 실증단지를 구축했다. 글로벌 에너지전시회 등에서 ESS는 주력으로 출품됐다. 이에 시장은 핵심 장비인 ESS의 급성장을 예견했다. 언론도 ESS 산업의 성장성을 조명하는 데만 치우쳐 있었다. 5월부터 수차례 사고가 발생했지만, 경각심을 가지지 못했다. 보완책 마련과 안전대책 강구 등을 주문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성공하겠습니다. 꼭 돈이 되게 만들겠습니다". 박근혜정부에서 산업통상자원부를 출입했다. 스마트그리드와 ESS, 신재생에너지 등 온갖 새로운 전력사업이 각광받았다. 당시 당국은 에너지신산업에 관한 브리핑을 할 때면 늘 이렇게 말을 했다. 사업을 성공시켜 시장을 키우겠다는 열망이 대단했다. 정권이 교체됐다지만, 신재생에너지 육성과 ESS 보급에 대한 의지는 여전하다. 당국의 마인드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부작용이 터졌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봐도 놀란다'고 한다. ESS 관련 기사를 쓰지만, 말만 들어도 불안하다. 사고 당사자들과 일반 시민들은 오죽할까. 사고 원인 파악과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는 게 중요한 시점이다. 대처에 따라 정부와 업계의 역량이 드러난다. 암울한 미래를 '멋진 신세계'라고 말한다. 반어법이다. 올더스 헉슬리가 1932년 암울한 과학문명을 예측해 쓴 소설 제목에서 비롯됐다. ESS 사고는 자칫 우리를 '멋진 신세계'로 안내할 수 있다. '멋진 신세계'를 조롱의 표현이 아닌 진짜 현실로 바꾸는 지혜가 시급하다.
최병호 산업1부 기자 choib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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