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섭다. 12월을 시작하는 동장군이 예사롭지가 않다. 서울의 첫겨울은 한 사흘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을 불러들이며 시작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얼어버릴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찬 기운이 기세를 부리던 미세먼지를 떠나보낸 탓일까. 하나둘씩 하늘을 건너는 구름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비록 날씨는 춥지만 그래도 미세먼지 없는 날이 좋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귓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추위 속에서 나는 최근 방송과 신문을 통해 접한 두 개의 기사를 떠올리며, 조금씩 가슴을 덥히고 있었다.
그 하나는, 병마를 이겨내고 2019학년도 수학능력시험에서 만점을 얻은 서울 선덕고등학교 3학년 김지명 군의 이야기다. 그는 12살 때 '백혈병' 진단을 받으며 투병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중학교 3년 내내 항암치료를 견디며,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완치 판정을 받았다. "백혈병이 무슨 병인지 몰랐다. 어감만으로도 죽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앓고 있는 병보다 '꽃가루 알레르기'가 더 공부에 방해됐다"는 언론과의 인터뷰는 어린 나이의 그가 병마를 극복하며 공부에 임하는 자세를 읽을 수 있어 가슴 뭉클하다. 동시에 기특하기도 하여 저절로 그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능 준비를 하면서 가장 고마운 사람으로 그의 '어머니'를 꼽는 대목에서는 울컥, 눈물이 솟구치기도 했다. 선덕고 근처에서 추어탕 집을 했던 그의 어머니에 대해 김 군은, "면역 수치가 떨어진 아들을 위해 음식을 정성을 다해 준비해 주셨고, 공부에 필요한 자료를 인터넷에 검색해 직접 출력해주시고 인터넷 강의도 직접 추천해 주셨다"며 그 고마움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어머니의 헌신과 아들의 굳은 의지가 빚어낸 아름다운 한 편의 시로 읽히는 듯하여, 그 감동이 남다르다.
대학 입학과 관련하여 최근 대학수시에 대한 불신을 점화시킨 이른바 ‘숙명여고 쌍둥이 사건’의 그림자가 아직도 우리의 일상을 짙게 드리우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무엇이 올바른 교육이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삶의 지향점을 제시해주기에 충분하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가슴에 잊히질 않을 기억으로 자리 잡으리라.
또 하나는, 바다 건너 일본에서 날아든 김기림(金起林, 1908-?) 시비 건립 소식이다. 시비는 지난 2018년 11월 30일, 일본의 센다이시(仙台市)에 위치한 도호쿠대학(東北大學)의 캠퍼스에 세워졌다. 일제 강점기 한국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인 김기림이 이 대학에 유학한 시기는 1936년부터 1939년까지 3년간. 시비에 새겨진,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라는 1939년에 발표된 그의 대표작 「바다와 나비」 전문을 몇 번이나 곱씹어 읽어보았기 때문일까. 시적 깊이가 가슴에 와 닿는 순간순간이 제법 행복하다.
지난 2017년 10월 28일, 역시 일본의 교토(京都) 우지시(宇治市) 시쓰카와(志津川)의 우지강(宇治川) 강변에 세워진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시비에 이어, 또 한 명의 한국 시인의 시비가 1년여의 시차를 두고 일본에 세워졌다는데 남다른 의미가 있다. 그것도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진 사례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널리 알리고 싶고, 오래 기억하고 싶은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일본에 세워진 한국인 시비는 교토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 있는 정지용(鄭芝溶, 1902~1950) 시인의 시비까지 합하면 모두 세 개에 이른다. 최근 냉각되고 있는 한일관계에 비추어보면 의미 있는 시그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작은 희망을 가져본다. 향후의 한일 관계를 푸는 해법의 하나로 문화의 힘이 작용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며칠 동안 문틈으로 새어 들어온 듯한 한기(寒氣)가 집안에서 잘 빠져나가지 않았지만,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떠올린 탓인지 내 마음이 조금씩 덥혀진다. 살아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도 이렇게 추위를 건너리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에도 겨울 꽃이 피어날 것 같은 계절이 깊어만 간다.
오석륜 시인/인덕대학교 비즈니스일본어과 교수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