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주변여건이 재벌들에게 적극적인 변신을 압박하고 있다. 이를테면 국민연금이 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범위와 권한 강화를 위한 스튜어드코드십을 올해부터 도입하기로 했다. 국민연금이 현재 5% 이상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기업은 300개에 육박한다. 쟁점사항에 대한 기관투자가의 의사결정을 선도할 만큼 영향력도 크다.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과정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주주가 주총에 참석하지 않아도 투표한 것으로 간주하는 새도우보팅제도도 지난해말 끝났다.
정부도 재촉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재벌개혁 필요성을 강조했다. 재벌들을 향해서는 기업활동을 위축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경쟁력을 높여줄 것이라고 적극적인 개혁을 권유했다. 그러자 재벌들 사이에 변신의 몸짓이 조금씩 가시화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5일 제시된 현황을 보면 재벌그룹의 변신노력이 열거돼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지난달 18일 앞으로 '주주권익보호' 담당 이사를 주주들이 직접 추천한 인사 가운데 선임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현대글로비스, 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 등 주요계열사에 주주추천 사외이사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같은 날 SK그룹도 SK이노베이션, SK텔레콤, SK하이닉스 등 주요 계열사의 주주총회를 분산 개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전자투표제도를 도입하기로 한 데이어 또하나의 ‘주주친화정책을 내놓은 셈이다.
비슷한 시기에 대림산업도 계열사 일감몰아주기를 해소하고 올 1분기 안에 순환출자를 완전히 해소하겠다고 발표했다. 계열사마다 이사회에 내부거래 위원회를 설치하고 계열사간 거래를 단절하겠다는 것이다. 롯데와 현대중공업은 순환출자를 완전히 해소하고 효성은 지주회사로 전환할 것이라고 한다. 이밖에 LG, LS, CJ, 태광 등도 각기 모종의 ‘변화’를 위한 조치들을 속속 선보이고 있다.
재벌들의 진정한 속마음을 아직 완전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발표 내용 그대로를 일단 믿어주고 싶다.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고 수용하려는 것이라고. 정부도 변화를 재촉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 재벌 스스로 변화해 주기를 기다리는 모양새다. 재벌저격수로 불리던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도 재벌개혁을 무리하게 강행하기보다는 재벌 스스로 먼저 변해 달라는 주문을 여러차례 해왔다. 특히 4대 그룹을 향해 변화를 보여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재벌공익재단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고, SK그룹에게 SK증권 주식을 매각하라고 명령하는 등 몇가지 가시적인 조치를 취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아직은 기다리겠다는 뜻이 더 강해 보인다.
올 들어 나타난 재벌들의 전향적인 몸짓은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몸짓을 두고 ‘개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우리나라 재벌들은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 기간중 보수단체에 자금을 지원하고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휘말리는 등 불미스런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국민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정경유착의 악몽을 떠올리게 됐다.
이제 중요한 것은 재벌이 그런 구태를 벗어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다 합리적인 지배구조와 사업구조를 갖춤으로써 정경유착의 악몽을 떨쳐낼 때가 된 것이다. 그래야만 권력의 어떤 부당한 강요에도 굴하지 않고 소신껏 경영하면서 국민의 사랑을 받는 기업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또 국내외 경영환경이 아무리 바뀌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탄탄한 기업으로 우뚝설 수가 있다. 그러므로 재벌에 대한 변화의 요구는 결국 남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재벌 자신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삼성의 향후 행보는 더욱 주목된다. 삼성에게는 크고 작은 과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럼에도 삼성은 지금까지 아무 것도 내놓지 않았다. 실질적인 총수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영어의 몸이었기 때문이라고 이해된다. 그런데 이 부회장이 5일 항소심에서 풀려났다. 그의 석방을 두고 세간의 비판은 거세다. 청탁을 부인한 법원 판결을 수긍하기도 참으로 어렵다. 그렇다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과정에서 국민연금이 무리하게 찬성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건전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부회장은 재판과정에서 지난 1년동안 스스로 돌아봤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부회장과 삼성은 정경유착의 그림자를 어떻게 지우고 변신할 것인지 내놓아야 한다. 그런 안팎의 요구에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하다.
차기태(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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