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히들, ‘수첩공주 박근혜’가 다른 사람과 조금만 더 소통을 하고 마음을 열었더라면 작금의 불행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본인과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모두 배신의 아이콘으로 치부하며 오만한 불통을 이어가게 한 폐쇄적 성격이 비극의 시작이자 끝이었다는 얘기다. 피보다 더 진한 물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40년 지기 최순실과의 관계나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박 전 대통령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고 있는 유영하 변호사를 끝내 놓지 못하는 이유도 전부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는 그와 같은 극단적 불신에 기인한다고 해석 가능하다.
인자하고 현명한 국모 육영수 여사와 절대 권력의 대명사였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로서 세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유난히도 어른스럽고 말수가 적은 영애’로 소녀시절을 보냈던 그는, 모친과 부친의 비명횡사를 계기로 누구도 믿지 못하는 성격이 형성되었고, 대마초와 사기 혐의로 각종 분란을 일으키고 있는 동생들 때문에 얼굴을 들지 못하는 나날이 계속되면서 점점 더 자기만의 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갔으리라 짐작된다.
전두환 군부 세력에 의해 청와대를 떠나 칩거한 지 18년 만에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선 후보와의 인연으로 정계에 복귀하고 대구 달서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그러한 폐쇄성이 약해지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명박 전 대통령과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다투면서 엄청난 내상을 입고, 커터 칼에 맞아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그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것 같다. 그래서일까, 원래부터 알고 지내던 몇 몇을 제외하고는 자기 곁에 사람을 두지 않고, 수첩에 꼼꼼히 이름을 적어가며 상 줄 사람과 벌 줄 사람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철저히 전달하는 성격이 더욱 강화되어 오늘의 그가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신헌법과 절대독재로 비난받지만, 한강의 기적과 새마을 운동으로 칭찬받기도 했던 아버지 박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과 결혼한 처녀'라는 박 전 대통령 역시 콘크리트 지지층을 기반으로 전폭적이고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한편,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는 극단적인 불통의 대명사로 비난받으면서도 2013년 2월 25일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그의 수첩사랑은 변하지 않았고, 그녀의 지시 사항은 유능하고 성실한 ‘폴리페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펜을 통해 총 56권 분량으로 작성되어 여전히 수첩 속에 숨 쉬고 있었다. 권당 60~70쪽 분량의 수첩들 대부분의 맨 뒷장에는 주요 관공서나 공기업, 대기업 등에 대한 인사 민원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고, 대통령 지시사항이나 별도 보고해야 할 내용들은 수첩 마지막 페이지부터 역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더욱이 박근혜 정부 핵심 실세들과 ‘비선 실세 최순실’의 시시콜콜하고 자질구레한 인사 청탁, 각종 민원의 내용이 구체화되어 있다. 잘 처리된 민원들은 ‘V’자로 표시되어 있기까지 하다.
안 전 수석의 수첩이 가지는 증명력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으로, 비록 서울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박 전 대통령이 아무리 ‘내가 지시한 것이 아니다’라거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적은 것이다’라고 증거 부인을 했다 하더라도, 그러한 변소가 재판부에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수석비서관 회의 등에서 작성된 회의록과 단순히 크로스 체크를 해보거나, 관련자들의 진술을 들어보기만 해도 수첩의 내용이 실제 박 전 대통령의 지시사항이었다는 점은 충분히 증명될 수 있고, 박 전 대통령이 받고 있는 모든 혐의들은 사실로 인정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박 전 대통령은 최씨가 부탁한 사항에 대해서는 집요할 정도로 안 전 수석에게 반복해 지시를 내리고 진행 상황을 꼼꼼하게 챙긴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수첩이 결국 집권 3년차 말에 이른바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로 이어져 그녀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는 점이다.
“어려울 때 도움을 준 인연으로 스스로 경계의 담장을 낮춘 것은 사실이나 최순실을 위해 어떤 행위를 하거나 사익을 추구한 사실은 절대 없었다”고 주장하던 박 전 대통령은 구속 나흘 만에 이뤄진 지난 4일 옥중 조사에서 “40년 지기 최순실 씨에게 이용당하고 속아 국정 농단이 있게 되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한다. ‘수첩공주 박근혜’는 정말 ‘최순실에 속고, 안종범 때문에 망한 것’일까? 지금이라도 그녀가 실체적 진실을 밝히고 본인의 행동에 떳떳하게 책임을 지는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기를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노영희 법무법인 '천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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