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10월. 왜소한 체구에 옹색한 얼굴, 병적인 콤플렉스와 조울증에 가까운 우월감을 가진 무직의 청년이 뮌헨 맥주홀에 처음 들어섰을 때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연설을 시작하면서 모든 사람들은 홀린 듯 그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탁성이지만 요점만 간결히 반복적으로 전하는 힘 있는 말투. 한 편의 오페라를 보는 듯한 격정적인 몸짓과 표정은 단번에 그를 전쟁에서 패배해 침몰하는 국가를 인양할 구세주로 만들었다. 논리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되, 청중을 하대하듯 내뱉는 그의 웅변에 봉건주의에 신물이 난 군중들조차 넋을 잃고 기꺼이 열정적인 지지자가 됐다. 혁명가의 가면을 쓴 선동가이자 통합적 절대 지도자라는 이름 뒤에 숨은 그는 용서받지 못할 학살자, 아돌프 히틀러였다.
뮌헨 맥주집 즉흥 연설로 일약 스타로 떠오른 그는 정계에 데뷔한 지 2년도 채 안된 1921년 7월 사회주의독일노동당의 당수가 됐다. 1년 뒤인 1923년 11월 뮌헨에서 봉기했다가 군부 관료들의 배신으로 투옥되지만 옥중 저서인 ‘나의 투쟁’을 발간하고 지지자들을 독려해 독일 국민들에게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농민은 물론, 자본가를 비롯한 지배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고 독일민족에 의한 유럽 제패를 실현하고 대생존권을 수립한다는 명목 하에 2차대전을 일으켰지만 무모한 욕망은 독일 국민은 물론, 전 세계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종말을 맞았다. 1945년 4월30일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자살할 적에 그의 곁에 남은 것은 애인뿐이었다.
참담한 일이지만 히틀러의 망령은 그가 죽은 지 70년이 지난 지금도 권력층을 비롯한 우리 사회 곳곳에 떠돌고 있다. 토론보다는 연설에 힘을 쏟고, 정계나 사회 요직에 도전할 때는 자서전을 펴낸다. 누가 듣든 읽든 안중에 없다. 논리나 상식에 근거하지도 않는다. 경쟁은 없고 비하와 마타도어만 있다. 자기가 목소리를 높이는 만큼 군중들이 호응하면 그만이다. 이런 ‘쇼’가 반복되면서 연단에 선자나 호응하는 군중들은 스스로 도취된다. 자기들만이 정의이고 양심이며, 진실이다. 생각이 다른 자나 비판하는 자는 배신자요 적으로 지목되고 인터넷과 SNS를 예리하게 갈아 무차별적인 린치를 가한다.
우리 국민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한 대통령을 스스로 끌어내렸다. 헌법과 민주주의적 질서가 제대로 작동한 것이다. 첫 경험인 만큼 아프고 혼돈스러웠지만 분열과 반목은 봉합되어 간다. 그럼에도 아직 탄핵심판 일주일 전 그 광장에 스스로 머문 사람들이 있다. 선동가들이다. 이들은 연단에서 헌법이나 법치를 부정하고 애당초 불가능한 청사진을 장밋빛으로 물들여 반복적으로 군중들에게 비쳤다. 현혹된 군중들은 그들을 광장으로 보낸 대통령 보다 선동가들에게 더 환호했다. 그들이 종국적으로 바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군중들의 환호에 도취될수록 선동가들은 더 무도하고 자극적인 웅변과 몸짓으로 시선을 잡아끌었다. 여기에 대중매체까지 관심을 보이면 더욱 광기를 띄며 폭주했다.
“사회 질서가 죽었다. 촛불이 죽였다. 민주주의가 죽었다. 정치인, 사법부, 언론, 종북이 합세해 죽였다.(중략) 탄핵 마약에 빠진 좌파들의 무소불위는 국민 이해와 관용의 정도를 넘어 섰다. 탄핵 독극물을 마셔버린 언론은 광견병 수준의 광란을 일으키고 있다. 탄핵 늪에 발이 빠진 특검과 헌재는 빠져 나올 생각보다 더 깊이 함몰되고 있다. 탄핵 청산가리를 꿀꺽 삼킨 정치는 의회쿠데타의 총을 내리지 않는다. 종북좌파들의 개망나니 짖거리에 북한이 연일 동지의 난수표들을 날려댄다.(중략) 이 땅의 10대여 왜 주저하는가. 이 땅의 10대여 왜 주저하는가. 이 땅의 20대여 왜 망설이는가. 이 땅의 30대여 왜 모른척 하는가. 이 땅의 40대여 왜 방관자로 있는가(생략).”
이 글은 이 난세에 스스로를 혁명가라 칭하는 선동가들 중 한명이 공표한 ‘대국민 호소문’의 일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군중에게 직접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글을 접한 식자들은 모두 ‘격문’이라며 호전적 선동성을 우려했다. 그러나 군중과 자신의 매개 역할을 해온 대통령이 파면되면서 이 선동가도 길을 잃었다. 기득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승부수를 던졌건만 군중들도 동료들도 모두 등을 돌렸다.
하지만 군중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아니 처음부터 다수의 군중은 달랐다. 그를 비판할지언정 비난하지 않았다. 적개심으로 노려보지도, 그가 옹위했던 대통령과 함께 축출해야 한다고 몰아세우지도 않았다. 측은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 역시 ‘표현의 자유’가 있고 헌법에 따라 보장돼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헌법과 민주주의를 부정하며 히틀러를 모방한 선동가들이 오히려 민주주의로 두텁게 보호 받고 있음은 군중, 우리 사회와 국가의 품격 때문이다. 선을 넘지 않는 한 군중과 국가는 끝없이 관용을 베풀 것이다. 그 관용을 수용할지를 결정할 사람은 선동가들 자신이다. 다만, 군중과 국가의 관용도 임계점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
최기철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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