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잔혹 스릴러 '대한민국'
2016-06-08 15:22:53 2016-06-08 15:31:46
“삶이 갑자기 멈추어 서더니 섬뜩한 것이 되었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으로 대작가의 반열에 오른 뒤 레프 톨스토이는 심각한 위기감을 느낀다. 자본주의의 등장과 결혼의 위기 등이 겹친다. 우울증에 사로잡힌 톨스토이는 대전환기 러시아의 소용돌이 앞에서 깊은 성찰을 시작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톨스토이는 “어쩌면 나는 내가 살았어야 하는 방식으로 살아오지 않은 것일지도 몰라”라고 한탄한다.
 
최근 우리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일련의 비극적 사건들은 너무 섬뜩해 우리를 멈추어 서게 만든다. 일부러 찾지 않아도 피할 수 없이 다가오는 사건들 앞에 사람들은 숨이 멎을 듯 멈추어 서서 분노와 슬픔을 토해낸다. 강남역과 구의역에 붙은 노란 스티커들은 화살처럼 아프다. 학부모가 포함된 섬 주민들의 초등학교 여교사 집단 성폭행은 절망의 강을 건넌다. 건설 노동자 4명의 목숨을 앗아간 남양주 지하철 공사현장 붕괴사고. 만삭의 아내와 어린 아들을 둔 곡성의 한 공무원은 투신자살하는 구직청년과 충돌해 사망했다. 최근의 사건사고들이다.
 
길을 가다가도 문득문득 떠올라 가슴을 짓누르는 기억들이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이 또 일어나고 있는가. 수백 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옥시 살인’이 벌써 잊혀질 정도다. 304명을 수장시킨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은 어디에 멈춰 서 있나. 200일이 넘은 백남기 농민의 상태는 어떤가. 이 세기말의 저주처럼 가득 덮인 미세먼지의 비열한 음모 안에서 또 무슨 잔인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이 ‘헬조선’의 팩트들은 퍼즐처럼 아귀가 맞지 않는다. 전방위적이다. 그리고 일상적이다. 아주 잔혹한 미스터리 스릴러다. 악마의 얼굴을 한 영화 <곡성>이 흥행하고 있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피해자 거의 대부분이 사회적 약자들이란 점이다. 여성, 비정규직 청년, 구직자, 건설 노동자, 아기들까지. 학살자 전두환은 여전히 잘 살고 있고, 이 와중에 재벌 대기업은 천문학적인 사내 유보금을 쌓아두고 이 비극을 즐기고 있다. 일하는 사람들의 유리지갑을 털어가는 종합소득세의 5월은 계절의 여왕이 아니라 세금의 악마로 상징된다. 조세정의가 파탄났기 때문이다. 판결을 돈으로 사고파는 순간에 사법정의는 ‘큰 물고기만 빠져나가는 촘촘한 그물’이라는 역설적 정의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2016년 대한민국의 삶이 갑자기 멈추어 서더니 섬뜩한 것이 되었다. 국가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노예가 되어 ‘위험의 외주화’와 ‘살인의 제도화’에 앞장서 왔다. 헬조선은 관료와 재벌의 강력한 유착이 낳은 필연적 결과물이다. 기업들이 사내 하청을 통해 일반화한 위험의 외주화는 국민들의 생존권을 볼모로 한 가장 심각한 범죄 가운데 하나다.
 
나는 ‘성장률 제로’를 공약으로 내건 정치인이 나오면 그를 단호히 지지할 것이다. 이 세계사적 저성장 시대에 경제성장률이란 자살과 실업과 고통과 살인의 크기에 답하는 이름일 뿐이다. ‘기업하기 힘든 나라’를 시대정신으로 내세우는 정치인이 있다면 그를 단호히 지지할 것이다. 이 끔찍한 불평등과 기업살인을 확대재생산 하는 기업은 더 이상 공동체의 일원이 될 자격이 없는 잠재적 범죄자일 뿐이다.
 
지난해 11월12일. 울산지방법원 303호 법정에서는 대규모 하청업체를 거느린 대기업에 대한 형사판결이 선고됐다. 2014년 한 달 사이 3차례 사고가 발생해 하청업체 노동자 4명이 목숨을 잃은 현대중공업과 그 하청업체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재판이었다.
 
당시 재판을 진행한 박주영 부장판사는 “빈부나 사회적 지위, 근로조건의 차이가 생명 격차로 이어지는 사회는 암울하다”고 했다. 이 사건으로 1년 매출 46조원인 현대중공업이 낸 배상금은 고작 1500만원이었다. 지난해 제2롯데월드 신축공사 현장 사망 사건에서도 롯데건설의 벌금은 1500만원, 또 한화케미칼 울산공장에서 폭발이 발생해 협력업체 노동자 6명이 사망했을 때도 한화케미칼의 벌금은 1500만원이었다.
 
신자유주의를 잉태한 대처리즘의 영국은 어떤가. 영국은 ‘기업살인법’을 제정한 뒤 벌금 상한선을 폐지했다. 영국은 업무와 관련된 모든 노동자 및 공중의 안전조치를 하지 않아 사망사고가 발생할 경우 기업 매출액의 2.5%~10%를 벌금으로 부과하게 돼 있는데 이 상한선마저 철폐한 것이다. 노동자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기업은 망해야 한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기업살인에 대해 10~20년의 중형을 부과할 수 있는 ‘노동자보호법’을 제출했다.
 
평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우정, 나의 종교>라는 책에서 국가에 대한 톨스토이의 생각을 전했다. “톨스토이의 생각에 따르면 세상에는 현존하는 사회질서의 모든 부당함을 비호하는 강한 권력을 가진 단 하나의 범죄자가 있는데, 이 범죄자가 바로 국가이다.” 정부와 국회는 이 범죄자의 혐의를 벗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잔혹 스릴러를 멈춰 세울 즉각적이고 단호한 조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선영 아이비토마토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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