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금쪽같은 시간들
2015-12-15 11:25:42 2015-12-15 11:25:42
YS는 DJ를 평생 라이벌로 여겼지만, 따라갈 수 없는 분야가 있었다. 분단극복과 평화정착 문제에 있어서는 철학·비전 모두 클래스가 달랐다. 그 분야 담당 기자인 나는 두 대통령 서거 당시의 ‘업무량’으로 그 차이를 체감했다.
 
DJ 서거 때는 여름휴가를 접고 돌아와야 했다. DJ의 외교·안보 참모들을 취재해 관련 업적을 정리했고, 북한 조문단 기사도 밤늦게까지 썼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당시 북한 조문단 방문을 두고 “DJ는 죽어서도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한다”고 했는데, 달리 말해 DJ는 죽어서도 일거리를 주었다. 반면 얼마 전 YS 서거 때는 한가했다. 회사에 눈치가 보여 겨우 하나 쓰긴 했다. 기사 제목은 'YS에 감정 안 좋은 북한, 서거 소식에 무반응'이었다.
 
이 차이에 대해 임 전 장관은 “YS는 민족문제를 국내정치에 이용하기만 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YS는 1992년 대선 때부터 DJ와의 차별화를 위해 한미 팀스피리트훈련 부활을 주장했고, 안기부가 발표한 간첩사건을 가지고 DJ를 공격했다. 당선 후에도 대북정책은 국내정치에 따라 냉·온탕을 오갔다. 한완상 전 통일부총리의 회고에 따르면, 문민정부 초기 대북 유화정책의 상징이었던 비전향장기수 송환도 YS가 신문 편집국장들과의 만찬에서 특종이라는 선물을 주려고 즉흥적으로 꺼낸 것이었다. 불과 며칠 전 송환을 진언했다가 퇴짜를 맞은 한 부총리로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국내정치에 좌우되는 오락가락 대북정책은 1994년 김일성 사후 더 심해졌다. 그로 인해 전임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으로 만들어진 한반도 냉전 해체의 기회를 날려버렸다. 1990년대 중반 금쪽같은 시간들을 YS는 허비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가. ‘신뢰프로세스’ ‘통일대박론’ 구호는 거창하지만 국내정치 상황이 불리하면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까지 서슴지 않는다. 지난 주말 남북 당국회담이 결렬된 것도 근본적으로는 분단극복에 대한 철학·의지가 없어서다. ‘금강산관광은 김정은의 달러박스’라는 인식을 극보수 지지층과 공유하다 보니 협상은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북한을 비난하는 것으로 결렬의 책임을 피해갈 수 있겠지만, 관광 재개 협상을 통해 상황을 주도하며 큰 그림을 그리겠다는 뜻은 찾아볼 수 없다. YS와 꼭 닮았다. 중국이 미국과 본격적으로 힘을 겨루기 전에 한반도 냉전 해체 작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금쪽같은 시간들이 또 흘러가고 있다.
 
황준호 통일외교팀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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