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대의민주주의 아래 선거의 공약, 그 말뜻은 '지키지 않을 말'이다. 이기는 사람이 모든 걸 갖는 유사 스포츠로 된 선거판에 선 후보는 일단 이기고 볼 일이다. 공약은 이기기 위한 기술 이상 아니게 된다. 못 지킬 게 빤한 말조차 표를 모으는 데 보탬이 된다면 버젓이 공약이 된다. 그것도 모자라, 가운데 뿌리 박고 움직이지 말아야 할 국가기관을 밀고 당긴다. 그 후의 시비는 죄다 선거 불복으로 몰아붙이면 그만이다. 이 나라 대의민주주의는 정글의 법칙 아래에 있다.
심한 진통을 겪은 1987년 민주화 이후의 절차적 민주주의, 그 성장배경은 불우했다. 결선투표 없는 직선제의 승자가 대통령으로서 권력을 거머쥐게끔 만드는 데 앞장 섰던, 김대중과 김영삼은 제 욕심을 이기지 못했고 군부독재의 수명을 늘리고 싶던 노태우를 '도왔다'. 김영삼은, 심지어 노태우와 손잡고 과거 독재 정권의 아들 격인 김종필까지 끌어들여(3당 합당), 대통령이 되었다.
그때 뿌리 뽑지 못한 독재의 종자는 끈질기게 살아 남아 김대중 정권에서 그 뿌리를 다시 다졌다(DJP연합). 단 한 표라도 더 얻는 후보자가 금배지를 다는 소선거구제는 그 소산이다. 그로써 호남의 김대중, 경북의 노태우, 경남의 김영삼, 충청의 김종필 뒤에 선 후보들은 그 그림자 아래 편히 국회로 들어갔다. 민주와 반민주 사이의 정치 구도가 어느새 호남과 영남 간 지역주의 정치판이 되었다.
6월 민주항쟁 정신의 절반도 잇지 못한 반쪽짜리 민주주의 아래 한 세대가 흘렀다. 그 사이 많은 정당이 나고 졌고 아직 남은 정당의 이름도 자주 바뀌었다. 다만, 제 자리 지키기에 안달한다는 점은 한결같다.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히고설킨 엘리트가 모인 한 줌의 ‘정치가계급’은 대다수 국민과 애초 궤를 같이할 수 없었다. 해서, 각종 이해관계에서 멀찍이 선 일반 국민이 의사 결정을 맡고 엘리트는 그 결정에 필요한 지식?정보를 전달하는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온전한 민주주의가 날 수 있는, 일종의 흙 고르기다.
요즘 국회는 선거구제 개편이나 비례대표제 확장 등의 말로 범벅이다.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온전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길 앞의 분탕질이다. 난리의 발단은 선거구 사이 인구 편차를 3대 1에서 2대 1 이하로 줄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다. 민주화 이후 반 세대가 지난 2001년, 헌재는 선거구 사이 인구 편차를 4대 1에서 3대 1로 줄이라는 판결을 이미 한 바 있다. 국회의원 의석수가 273석에서 299석으로 많아졌을 뿐이다.
정치가계급은 금배지 개수를 늘림으로써, 애오라지 제 자리를 지켰다. 다시 반 세대 지난 요즘의 시끄러움 또한 마찬가지다. “인민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심각한 착각이다. 그들은 선거기간 동안만 자유로울 뿐이다. 선거가 끝나면 그들은 다시 노예가 된다”라는 장 자크 루소의 비아냥이 여전히 뼈아프다. 국민의 몫이 정치가계급으로 하여금 멋대로 굴 판을 짜는 것으로 끝나는 반쪽짜리 민주주의에 대한, 200년 넘은 비판이 여태 통렬하다. 그 누구도 노예로 살지 않는 온전한 민주주의는 어떻게 가능할까.
덴마크가 눈길을 끈다. 덴마크의 ‘시민합의회의’는 시민의 제비뽑기로써 구성한다. 각 집단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약 스무 명이 이룬 그 회의는 전문가들로부터 의사 결정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듣고, 국회의사당에서 직접 의사결정을 내린다. 중국 상하기 남쪽 제구오진에도 비슷한 방식의 제비뽑기 민주주의가 그 지역의 전통이 되었다.
우리도 같은 결의 경험을 했다. 작년 연말의 논란이었던 서울시민인권헌장은 지원자 1,570명에서 뽑은 시민 150명과 전문가 30명이 만들었다. 전문가는 정보 전달 외의 개입을 될 수 있는 한 참았고, 시민은 몇 차례의 토론으로써 서로 다른 생각 사이의 공통분모를 찾았다. 승부 가르기가 아닌 지난한 설득의 합의, 이른바 ‘숙의 민주주의’를 시민이 몸소 보였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최고의 민주주의 이론가 로버트 달이 줄기차게 외친 ‘평범한 보통 사람들에 대한 신뢰’의 요구다.
누구나 스스로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곳에서 온전한 민주주의가 날 수 있다. 그때 그곳의 모든 사람은 선거철뿐 아니라 늘 자유롭다. 제비뽑기가 그리 나아가는 한 방법이다. 절차뿐인 이 나라 민주주의는 한 세대를 지나며 제 유통기한을 다 했다. 요즘 들어 물큰한 곰팡내는 그 징후다. 제 자리에 안달하는 정치가계급을 걷어내는, 차세대 민주주의를 설계할 때이다.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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