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 9집 앨범을 발표한 가수 서태지. (사진제공=서태지컴퍼니)
[뉴스토마토 정해욱기자] 요즘 이 가수가 이슈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가수 서태지가 새 앨범을 내놨는데요. 지난 20일 발매된 서태지의 정규 9집 ‘콰이어트 나이트’(Quiet Night)는 지난 2009년 발표됐던 8집 앨범 이후 약 5년만에 서태지가 내놓는 새 앨범인데요. ‘문화 대통령’은 ‘문화 대통령’이네요.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언론과 대중의 집중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서태지가 오랜만에 발표하는 앨범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어떤 음악을 선보일지 관심이 집중됐었는데요.
그런데 이런 뜨거운 관심을 받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자신을 ‘한물간 가수’라고 표현을 합니다. 지난 18일 열린 컴백 콘서트에서도 그랬고요, 20일 열린 컴백 기자회견에서도 그랬습니다. 이번 앨범의 수록곡인 ‘나인티스 아이콘’(90s ICON)의 가사에 이와 관련된 서태지의 솔직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요.
"낡아빠진 액자에 갇혀버린 환영들. 내 바람과 망상들로 내 방을 채워가네. 덧없이 변해간 나는 카멜레온. 내 피부가 짓물러도 조용히 감출 뿐. 한물간 90s Icon. 화려한 재기의 기회가 언제일까 망설이네. 질퍽한 이 망상 끝을 낼까"라는 가사입니다. "나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하는 '문화 대통령'을 보면서 어딘가 짠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요.
서태지의 이런 자기 고백은 일정 부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게 사실입니다. 서태지의 노래는 가요계를 뒤흔들어놨던 90년대 만큼 잘 팔려나가지 않습니다. 서태지의 정규 9집 앨범 수록곡들의 음원 성적을 살펴보면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음원 차트 상위권엔 까마득한 후배 가수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는데요.
그런데 이런 상업적인 측면을 떠나 음악만을 살펴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교실이데아'나 '시대유감' 같은 곡에서 사회를 향해 직설적인 방식으로 창끝을 겨눴던 것과 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서태지의 새 앨범에 수록된 노래들엔 여전히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이 포함돼 있고요,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자신만의 실험적인 음악 스타일로 듣는 이들의 귀를 사로잡습니다. 자신을 '한물간 가수'라고 표현했던 서태지가 역설적이게도, 새 앨범을 통해 자신이 한물간 가수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인 셈인데요. 10대와 20대의 젊은 가수들은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노래에 담아내고,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통해 가요계에 자극을 주는 것. 그게 바로 40대가 돼버린 '문화 대통령'의 존재 이유고, 그가 해야할 일이기도 하겠죠.
서태지는 지난 8월 첫 딸을 얻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아빠가 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일텐데요. 이번 앨범을 들어보면 그런 개인적 경험이 음악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앨범의 마지막 트랙에 담긴 '성탄절의 기적'이 대표적인 예인데요. 서태지가 딸을 위해 만든 태교 음악입니다. 실제로 서태지가 아내의 뱃속에 있던 딸에게 들려주기도 했던 곡이고요. 동양적인 느낌의 사운드와 플룻 연주가 인상적입니다.
"딸과 함께 들을 수 있는 앨범을 만들고 싶었다"는 서태지는 이번 앨범을 동화 콘셉트로 구성했습니다. 앨범 커버에 등장하는 소녀가 세상을 여행하며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와 그 소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서태지의 이야기가 이번 앨범을 관통하는 큰 주제입니다.
그런데 그 동화가 예쁘고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앨범이 발매되기 전 선공개돼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던 '소격동'과 '크리스말로윈'에서 그런 점을 잘 느낄 수 있는데요.
1980년대 소격동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그려낸 '소격동'엔 서태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의 소격동은 군사 정권이 누렸던 무소불위 권력의 상징과도 같은 국군보안사령부(현 국군기무사령부)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죠. 그리고 '울면 안돼'라는 캐롤을 모티브로 한 '크리스말로윈'에서 서태지는 "넌 이제 모두 조심해 보는 게 좋아 (Just like a butterfly to check and verify) 왜냐하면 산타가 곧 오거든 내가 값진걸 베풀지 너희에게 (오늘 딱 하루의 꿈 Like a TV Show) 아님 말지 뭐.. 싹 다 뺏겨"라는 가사로 기득권에 대한 비판을 담아냅니다.
서태지가 하는 음악의 장르를 한 마디로 정의하긴 쉽지 않습니다. 긴 시간 동안 자신만의 색깔로 가득찬 음악을 해온 탓에 '서태지'란 말 자체가 하나의 음악 장르가 된 느낌도 주는데요. 이번 앨범에 수록된 노래들의 장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없는 단어가 바로 일렉트로닉입니다.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신디사이저 사운드가 앨범 전반에 깔려 있는데요. 이를 통해 서태지는 동화에서만 볼 수 있을 것 같은 판타지의 세계를 그려냅니다. 4번 트랙에 담긴 '숲 속의 파이터'가 대표적인데요.
이 노래는 서태지가 미국 서부의 조슈아 숲을 비롯해 북미 지역을 여행하면서 얻은 영감이 담긴 곡이라고 하네요. 여행을 통한 새로운 경험과 모험담을 동화적 상상력으로 그려냈고요. 곡 전체를 이끄는 사운드가 신비로우면서도 감각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5번 트랙엔 '프리즌 브레이크'란 곡이 담겨 있는데요. 같은 제목의 미국 드라마가 국내에서 높은 인기를 얻었었죠. 죄수들이 감옥에서 탈출하는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인데요. 서태지는 어디에서 탈출을 하고 싶은 걸까요?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서태지는 테크놀로지와 미디어에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는 우리들의 세태와 현실을 풍자합니다. 서태지다운 주제 의식이죠?
그리고 7번 트랙에 실린 '잃어버린'은 숨 가쁘게 살아가다 문득 "과연 나는 잘 살아 왔나?"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뒤, 잠시 멈춰 서서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한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되는 내용을 담은 곡인데요. 희망적인 느낌의 사운드가 듣는 이들에게 청량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빡빡한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노래입니다.
8번 트랙엔 사랑하던 사람과 오해와 갈등을 겪고 난 뒤의 공허함과 허탈함에 대해 노래한 '비록'이 있습니다. 서태지는 "가여운 마음이 나를 재촉해. 내 마음 뒷면의 아픔도 보이고파. 지나간 시간 우리 서로에게 상처 입힌 날들 조차 그저 다시 사랑스럽다 해요"라고 노래하면서 진심을 담은 기다림을 통해 산산이 부서진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을 담아냈는데요. 이 곡의 멜로디 전개 역시 '잃어버린'과 마찬가지로 희망적인 느낌을 줍니다. 가정을 꾸리고, 예쁜 딸을 얻으면서 행복을 느낀 서태지의 감정이 이번 앨범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이번 앨범이 발매되기 전,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오랜만에 가요계에 컴백하는 서태지가 어느 정도로 대중적인 음악을 내놓을 것인가였는데요. 감성적인 느낌의 '소격동'이 실렸다는 점, 타이틀곡인 '크리스말로윈'에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을 선명한 멜로디 훅이 포함돼 있다는 점, 희망적인 멜로디와 가사의 노래가 수록됐다는 점 등에서 서태지가 비교적 대중적인 노래들을 내놨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신 좀 더 대중적인 스타일의 음악을 원했던 대중들의 입장에선 앨범 전체를 채우고 있는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다소 낯설게 들리기도 하고, 상징과 비유를 담아낸 가사들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드네요. 서태지가 요즘 아이돌들과 별 차이 없는 힙합, 댄스 음악을 한다면, 재미 없지 않을까요?
< 서태지 정규 9집 'Quiet Night' >
대중성 ★★★☆☆
음악성 ★★★★☆
실험성 ★★★★★
한줄평: 딸을 위한 '문화 대통령'의 잔혹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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