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배덕훈 기자] 한미 관세 협상의 ‘데드라인’이 눈앞에 다가오자 정부와 재계가 막판 ‘총력전’에 나섰습니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이어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까지 재계 총수들이 앞다퉈 미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잇따라 미국 출장길에 오른 것은 정부를 측면에서 지원하기 위함으로 해석됩니다. 재계 총수들은 관세가 한국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미국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등 정부를 적극 보조해 협상력 강화에 힘을 실을 것으로 전망됩니다. 재계 안팎에서는 조선과 반도체 산업을 이번 협상의 핵심 카드로 꼽고 출국한 총수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9일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SGBAC)를 통해 워싱턴으로 출국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30일 재계에 따르면 정 회장은 이날 오후 미국 워싱턴으로 출국합니다. 지난 28일 김 부회장과 전날 이 회장에 이은 세번째 재계 주요 인사의 미국행입니다. 재계에서는 이들 총수가 각각의 산업 협력 방안과 대미 투자 확대 등을 제안하는 등 정부의 관세 협상단에 큰 힘을 실을 것으로 전망합니다.
현재 한미 관세 협상 시한인 8월1일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협상 타결의 가장 큰 난관은 투자 규모에 따른 한미 간 간극이 크다는 점입니다. 한국 정부는 ‘1000억달러+α’ 규모의 대미 투자 계획을 준비했지만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4배인 4000억달러의 투자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이날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러트닉 장관이 한국 당국자에게 “최선의 최종적인 무역 협상안을 테이블에 올려달라”고 촉구했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재계에서는 연달아 미국행에 나선 총수들이 이번 관세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특히 트럼프 정부가 미국 내 제조업 부활에 목을 메고 있는 상황에서 쇠락한 조선과 반도체 부흥은 상당히 매력적인 카드이기에 민관이 함께 제시하는 조선·반도체 산업 협력이 협상에서 핵심 카드로 사용될 것으로 관측됩니다.
앞서 한국 정부는 미국 측에 수십조원 규모의 조선업 프로젝트인 일명 ‘마스가’(MASGA, 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를 제안한 바 있습니다. 한국 민간 조선사들이 대규모 현지 투자를 하고 정부가 대출·보증 등 금융 지원을 통해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을 골자로 합니다. 김 부회장은 마스가 프로젝트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오른쪽)이 지난 5월30일 한화오션 거제사업장에서 존 펠란 미 해군성 장관(오른쪽 두번째)에게 선박 블록 조립공장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한화오션)
한화그룹은 김 부회장이 이끄는 한화오션과 한화시스템을 통해 지난해 12월 미국 필리조선소(한화필리십야드)를 1억달러에 인수한 이후 대미 투자·협력을 강화해온 바 있습니다. 특히 한화오션은 올해 2분기 미 해군 대상 유지·보수·정비(MRO) 사업의 견조한 실적으로 수익 기반을 넓혀가는 등 미국 시장 확대에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한화그룹은 한화필리십야드에 대한 추가 투자와 기술 이전, 인력 양성 등의 계획을 정부에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최근 테슬라와 대규모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수주로 ‘잭팟’을 터트린 삼성전자의 이 회장도 관세 협상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370억달러(약 54조원)를 투자해 파운드리 공장과 연구개발(R&D) 시설을 짓고 있는데, 미국 측이 대미 투자 확대를 요구하고 있는 만큼 투자 규모 확대 방안이 이번 협상에서 논의될 가능성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테슬라의 차세대 인공지능(AI) 칩 ‘AI6’를 내년부터 테일러 공장에서 생산하기로 한 만큼, 미국 고객 확보 차원에서 대미 투자 확대에 속도가 붙을 것이란 관측도 더해집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3월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 대미 신규 투자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글로벌 3위 완성차 그룹 수장으로 앞서 트럼프 대통령과 210억달러(약 31조원) 규모의 현지 투자를 발표한 정 회장도 정부의 협상력 강화에 큰 기여를 할 전망입니다. 특히 25%의 자동차 품목 관세의 경우 경쟁국인 일본과 유럽연합(EU)이 15%로 인하에 성공한 만큼 직접 나선 정 회장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한국이 현재 적극적으로 쓸 수 있는 카드는 조선과 반도체 산업일 것”이라며 “조선의 경우 투자를 통해 미국과 윈윈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반도체의 경우는 투자보다는 산업 동맹이나 미국 생태계 구축 등 협력 쪽에 방점이 찍힐 것 같다”고 내다봤습니다. 그러면서 “대미 투자가 늘면 반대로 국내 산업 공동화 이슈가 생길 수 있기에, 신규 투자에 따른 제도적인 지원책을 미국에 확실히 요구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배덕훈 기자 paladin70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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