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독서(賜暇讀書). 조선 시대 유능한 문신들을 대상으로 오랜 휴가를 줘 독서당(讀書堂)에서 마음껏 책을 읽도록 한 왕의 선물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공무원 장기 연수인 셈이다. 태조 때 변계량이란 인물이 제안했으나 시행되지 못하고 1426년(세종8)에서야 도입됐다. 이후 세조 때 없어졌다가 1476년(성종7)에 점차 부활한다.
왕들은 조정의 업무에 시달린 신하들에게 쉼표를 찍어주고, 관심분야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을 줬다. 창의적인 인재를 양성해 혁신을 일궈 내고픈 의지가 엿보인다.
당시 주변 신하들은 사가독서에 발탁된 자들을 향해 '아무 일 없이 책만 읽어도 쌀과 콩이 나오니 천하태평이 따로 없다'는 농을 했다고 한다. 책만 읽고 빈둥대도 삭료(朔料)는 꼬박꼬박 챙겨간다는 의미의 농이지만 그렇게 왕으로부터 발탁 된 동료가 부러워 던진 말일 것이다.
하지만 농과 달리 사가독서에 돌입한 이들은 막대한 량의 연구 성과물을 내야했다. 자신들이 읽은 책이 얼마나 됐는지 철마다 나열해 제출하고, 한 달에 세 차례씩 독파한 서책과 관련된 연구물(논문형식)인 월과(月課)도 내야했다.
그에 대한 성적을 매기고 시상까지 했다고 하니, 그 안에서의 경쟁도 참으로 치열했을 것이다. 영광스러운 자리임과 동시에 주변인들의 농처럼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는 증거다.
사가독서는 무려 340여 년 동안 이어졌고, 이를 통해 역사가 기억하는 300여명의 인재들을 발굴해 냈다. '향약집성방'을 저술한 권채와 '고려사절요'를 저술한 남수문이 그들 중 하나요. 선조 2년 34세 약관의 나이로 '동호문답'을 과제물로 낸 율곡 이이 또한 사가독서의 혜택을 받은 걸출한 인재다.
오늘날 국회의원들 역시 국민들의 선택을 받고 사가독서에 들어간 인재로 볼 수 있다. 국민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그 결과를 제출하라고 매달 삭료도 지급한다. 그를 모시는 보좌진들에게 까지 국민의 콩과 쌀을 내놓는다.
하지만 요즘 같아선 삭료가 더 아깝다. 도무지 국민을 위한 성과물을 내 놓지 못하고, 여전히 비전 없이 자아도취에만 빠져 있는 모양이다.
지금 국회에는 투자를 유치하고 경제에 숨결을 불어 넣어 줄 100여개의 민생법안이 계류돼 있다. 국민들의 관심이 큰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폐지, 취득세 영구인하 등 부동산 관련 법안은 처리되지 못한 채 수년 동안 먼지에 쌓여 있다. 3.9%의 경제성장률이 가능하다는 경제부총리의 말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이유다.
무능한 정부와 양보라고는 눈 씻고도 찾을 수 없는 외통 정치권을 두고 국민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벌써부터 12월 10일 올해 마지막 정기국회 일정 전까지 민생 법안은커녕 내년도 예산 처리도 못할 지경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국회만 가면 '올스톱' 이라는 웃지 못 할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답답한 건설·부동산 협회 대표단이 국회 앞에서 부동산법안 처리를 호소했다. 수도권 전세가가 60주 상승세를 보이며 역대 최악이었던 65주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11년 만에 서울의 평균 전세가가 매매가의 60%를 넘어섰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는 정부기관과 기업에 호통만 치고 있으니 주객이 전도됐다는 손가락질을 받을 만하다.
이제는 독서당에서 나와 성과물을 낼 때다. 그 자리는 그냥 저냥 앉아 있어도 쌀과 콩이 나오는 만만한 자리가 아니다. '나름 국민을 위해서'라는 자기고집 말고, 그동안 한일이 무엇인지 제출하고 성과물에 대한 평가를 받아야 할 때다.
부디 민생을 위해 마련된 법안들이 또 다시 계류 돼 치명적인 정책 실패로 이어지지 않길 바란다. 국민에게 발탁된 그들 중 걸출한 인재도 나오길 바란다.
박관종 생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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