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이 원세훈 원장의 지시로 지난 대선에 박근혜 후보를 지원하는 인터넷 여론 작업을 벌였고 그 일단이 대선투표일을 눈앞에 두고 드러나자 김용판 서울경찰청장이 댓글이 없다는 허위의 수사결과를 발표하게 했다.'
거칠게 요약한 국정원 사건 검찰수사 결과다.
만약 국정원장이나 서울경찰청장이 문재인 후보를 지원하려고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지금 새누리당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지 궁금하다.
추측컨대 최소한 지금 민주당이 반발하는 것의 몇배로 융단폭격을 퍼부으며 총력전에 나섰을 것이다. 진작에 문재인 후보가 이를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 여부를 파고들면서 화살을 직접 겨누었을 것이고, 아마도 대선결과 자체를 뒤집으려까지 했을 것이다.
범죄자의 위법한 행위로 인해 수혜를 입은 사람에 대해 그 범죄자, 범죄행위와의 공모여부를 살펴보는 건 당연한 상식이다.
그러나 수혜자가 된 새누리당은 전직 국정원장과 서울경찰청장을 감싸기 바쁘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이 거론되는 것을 온몸으로 막고 있다.
민주당이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국정원을 활용했다느니, 국정원 직원의 인권유린 사건이라느니, 심지어 검찰 수사팀의 검사가 과거 운동권이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정도면 정말이지 처절하게 버틴다고 해야할 지경이다.
박근혜 캠프 몸통론이 나온 17일에는 엉뚱하게 김부겸 의원 몸통설로 어깃장을 놓으면서 불길이 박근혜 대통령에게로 번지는 걸 필사적으로 막았다.
그간 새누리당 내부에서도 소장파니 개혁파니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얘기라고 할지라도 반성과 대책을 촉구하는 모습이 적지 않았다.
대선주자급으로 부각되는 일부 다선의원들도 차별성을 위해서였을지언정 입바른 소리를 '때때로' 내뱉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벌어진 전대미문의 대선 개입 사건을 두고는 이런 모습이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왜 그럴까.
과거의 입바른 소리가 아무리 독했어도 절대권력자 박근혜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르는 '불경죄' 정도였다면, 이번 사건에 대한 입바른 소리는 정권 자체를 부정하게 될 수 있는 '대역죄'에 해당되기 때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박 대통령에게 지금 가장 고마운 사람이 누굴까. 원세훈도 아니고 김용판도 아니고 황교안은 더더욱 아니다.
바로 국정원과 경찰의 부당한 선거개입의 진실을 밝혀주고 재발방지 대책을 만든다면 박 대통령은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한 문재인 의원이다.
문재인 의원은 앞으로 정국이 흘러갈 방향의 키를 쥐고 있다. '지난 대선은 국정원과 경찰이 개입한 부정, 불법선거이며 결과의 정당성이 의심된다'는 말 한마디면 정국은 한치 앞을 볼 수 없게 격렬히 요동치게 된다.
그런 사람이 재발방지책을 만들면 박 대통령은 책임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선언을 했으니 자칫 촛불시위 같은 민란을 만나게 될 지도 모르는 박 대통령으로서는 얼마나 고맙겠는가.
다른 이도 아닌 대선에서 경쟁한 상대주자에게 운명의 키가 맡겨진 상태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하룻강아지같은 소장파가 반성이니 사과니 들먹이는 순간 이는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책임을 인정하는 의미가 된다.
그렇게 되면 정권의 정당성을 내부에서 훼손하게 되는 것이고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명백한 반역죄이며 여의도발 쿠데타다.
아무도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지만 새누리당도 이 문제가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로 번질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박근혜의 '박'자만 나와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권력의 풍향을 본능적으로 아는 의원들이 어떻게 이런 국면에서 나설 수 있겠나. 의기만 앞세워 앞뒤없이 나서다가는 자칫 밉보이는 정도가 아니고 당내에서 당장 반역자로 낙인이 찍힌다.
소장파도 좋고 반성도 좋고 잘못된 건 맞지만 새누리당 의원들로서는 옴짝달싹도 하지 말아야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이호석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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