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순욱기자] 안철수 무소속 후보가 16일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단일화 협상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날 안 후보의 기자회견 중 핵심 메시지는 두 문장에 있다.
"정치 혁신은 낡은 구조와 낡은 방식을 깨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민주당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는 부분이 하나다.
또 하나는 "문재인 후보께서 낡은 사고와 행태를 끊어내고 인식의 대전환을 이끌어 주시길 바란다. 국민들께서 요구하시고 민주당 내부에서 이미 제기되는 당 혁신과제들을 즉각 실천에 옮겨 주십시오"에 있다.
그런데 이 발언은 그 자체로 상호모순되는데다가 안 후보 특유의 모호성 때문에 비판대상이 되고 있다.
◇선문답으로 일관하는 안철수의 정치쇄신
무엇보다 안 후보의 기자회견 이후 여론의 반응은 비판적이다. 그 이유는 '모호성' 때문이다. "도대체 안철수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라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안 후보가 말하는 정치쇄신에는 실체가 없다. 안 후보는 '낡은 구조와 낡은 방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 없다. 그렇다고 안후보의 캠프에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한 적이 없다.
요구를 받은 문 후보 측에서는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라고 반응할 수밖에 없다.
안 후보가 늘 들먹이는 '국민'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문재인 후보와 민주통합당은 무얼 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문 후보가 이날 오후 12시 40분부터 1시 30분까지 선대위원장단과 오찬회의를 가진 후 "그 진의를 좀 더 파악해달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더 나아가 선대위원장단이 일괄 사의를 표명했지만 반려했다. 안 후보의 진의가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 후보가 언급한 "민주당 내부에서 이미 제기되는 당 혁신과제들"도 논란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혁신과제인지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간 민주당 내에서 제기된 바로는 '이해찬 대표와 박지원 원내대표의 퇴진', 즉 인적 쇄신이 있다. 패권주의 청산과 동일한 연장선에 서있다.
이해찬 대표에게 밀려 2등으로 최고위원에 올랐던 김한길 의원이 대표적이다. 김 의원은 지난 1일 지도부에서 사퇴했다. 그리고 다른 지도부의 총사퇴를 요구했다.
하지만 안 후보 캠프의 유민영 대변인은 이날 현안 브리핑을 통해 단일화 협상 재개의 조건으로 이해찬 대표와 박지원 원내대표의 퇴진을 거론한 것 아니냐는 데 대해 "그런 사실 없다"고 부인했다.
설사 인적 쇄신이라 하더라도 문 후보를 돕고 있던 소위 친노의 전해철, 양정철, 이호철 등 '3철'을 포함해 박남춘 특보단 부단장, 김용익 공감2본부 부본부장, 윤후덕 후보 비서실 부실장, 정태호 전략기획실장, 소문상 후보 비서실정무행정팀장, 윤건영 일정기획팀장이 지난달 21일 일괄사퇴했다.
단일화 협상 중단 사태에 맞물려 백원우 정무특보도 사퇴했고, 김현 대변인도 선대위에서 물러났다.
더구나 문 후보는 "물러났으면 더 이상 선거운동에 관여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물러난 척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선대위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문 후보로서는 사실상 무장해제를 당한 것이다.
안 후보측에서 단일화 협상을 중단한 이유의 하나로 거론한 "안철수 후보가 막판에 양보할 것"이라는 발언의 경우 안 후보측도 자유롭지 못하다. 안 후보측에서도 공공연히 "문재인 후보가 막판에 양보할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안 후보가 원하는 민주당 쇄신에 무엇이 있느냐는 것이다.
중앙당 축소 등 새정치공동선언 협상팀에서 논의중인 사안은 협상중이었고, 이미 발표만 못했을 뿐 타결된 사안이기 때문에 그 실체가 더욱 오리무중이라는 것이다.
◇새누리당에는 있고, 민주당에는 없는 것.. 승복문화
안 후보가 민주당의 쇄신을 줄곧 요구하고 있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한 바가 없다.
하지만 안 후보가 요구하는 바와 무관하게 민주당의 최고의 혁신 과제는 승복문화다. 새누리당은 97년 대선 당시 이인제 후보의 경선불복으로 대선에 패배한 이후 승복문화가 자리잡았다. 불복한 정치인에게 미래를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박근혜 후보의 국민대통합 추진 차원에서 이인제 의원이 15년만에 복귀하기는 했지만, 15년 동안 불복은 없었다.
역사적으로 민주당은 소위 '3김 정치'로 일컬어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1인 리더십에 의해 움직여왔다. 하지만 2002년을 기점으로 김 전 대통령은 민주당 탈당과 대통령 퇴임으로 민주당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 해에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사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하지만 2002년 월드컵 열기로 정몽준 후보의 인기가 치솟자 후보단일화를 추진하는 세력이 등장했다.
그리고 노 후보의 사퇴, 민주당 탈당 등이 일어났다. 이른바 '후단협사태'다. 후단협은 국민들의 응징을 받았다. 김민석 전 의원은 그 상징처럼 여겨져 사실상 국민들로부터 정계은퇴를 강요받고 퇴장한 상태다. 나머지 후단협 의원들의 경우도 몇몇을 빼고는 국민들의 심판을 받고 거의 다 정계에서 은퇴한 상태다.
후단협 사태의 본질은 불복이다.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승부를 펼친 이후 승자를 인정해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민주주의 작동의 기초적인 부분이지만 민주당은 아직도 불복문화가 만연되어 있다.
민주당의 문재인 후보는 지난 9월16일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 하지만 문 후보의 반대편에 섰던 의원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선거를 남의 일처럼 구경만 하고 있다.
심지어 호남 출신으로 수도권에서 재선한 모 의원은 자신의 페북에 "현재의 민주당은 수권능력이 없다"는 정치평론가의 멘트를 그대로 전재하기도 했다. 사실상 해당행위를 버젓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안 후보가 단일화 협상 중단 선언 이전까지 전화통화를 했다는 30여명의 민주당 의원이 누구인지 세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국민들은 '제2의 후단협'이 등장하고 있다는 신호로 읽고 있다.
더구나 정대철 전 민주당 대표와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등 전직 국회의원 67명이 이날 야권후보 단일화 협상이 중단된 상황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는 동시에 타개 방안으로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에 대해 민주통합당 당원의 '자유선택'을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이는 사실상 문재인 후보를 민주통합당 공식 후보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2002년 노 전 대통령을 향해 후보사퇴와 단일화를 요구하며 탈당을 했던 후단협과 다를 바가 없다는 평가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새누리당은 97년 이후 불복문화를 제거해 정당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진보를 거듭한 반면, 민주당은 10년만에 불복문화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문제는 안 후보가 말하는 정치쇄신에 이같은 불복문화 타파가 들어있느냐는 것이다.
◇스스로 딜레마 상황을 만든 안철수 후보
이날 안 후보의 기자회견은 결과적으로 딜레마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버렸다.
안 후보 본인은 '낡은 정치 청산', '정치쇄신'을 외치고 있지만, 실상 안 후보는 그 낡은 정치와 손을 잡는 형국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에 입당한 것도 아니고, 2002년 당시 정몽준 후보처럼 새로운 정당을 만든 것도 아닌데 민주당 당원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면 그 자체로 구태정치가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 안 후보 캠프에는 민주당 경선 이후 손학규, 김두관 캠프 등에 몸담았던 실무진이 몸담고 있다.
이에 대해 안 캠프에서는 "현역 정치인도 아닌 캠프 실무진들이 소속을 옮기는 것은 철새로 비유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국민의 시선은 곱지 않다.
특히 박선숙 선대위원장의 경우 4.11 총선 당시 민주당 사무총장으로 선거를 이끌었던 '선거패배의 책임자'라는 점에서 '불복의 정치인'이라는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여기에 더해 안 후보측에서는 줄곧 4.11 총선 패배의 원인을 '공천논란'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당시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이었던 김호기 교수가 안 후보 캠프에 몸을 실었다.
송호창 의원의 경우 오랫동안 과천·의왕 지역구에서 공천을 받기 위해 노력하던 민주당 후보들과 경선 자체를 거치지 않고 '전략공천'을 받은 케이스다.
안 후보가 말하는 정치쇄신의 대상에 '무분별한 자기 사람 심기용 전략공천'이 있다면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결국 안 후보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낡은 정치 청산'을 주문했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밝히지 않음으로써 민주당의 후진성에 기대는 정치인이 될 위험성을 안게 된 셈이다.
만약 민주당에서 이해찬 대표 퇴진, 민주당 차원의 선대본부 해체 등을 내걸고 나올 경우 안 후보는 한 순간에 '낡은 정치인'의 대명사가 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봉착한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안 후보의 정치가 새로운 정치인지, 낡은 정치인지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국민들은 안 후보식 '선문답 정치'에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정치혐오증의 반사이익으로 대안으로 떠오른 안 후보가 한 순간에 정치혐오의 대상이 될 위험성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안 후보 스스로의 '모호한 화법', '선문답식 정치', '간보기식 정치'가 빚어낸 결과물이다.
대선 후보 등록 마감이 불과 열흘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안 후보가 어떤 정치행보를 보여줄지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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