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기성기자] "회장님 출석 여부에 따라 우리 목숨이 달렸습니다. 어떻게든 막아야죠."
추석 연휴 직후 시작될 국정감사를 앞두고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19대 국회 첫 국정감사인데다 여야 모두 경제민주화를 대선 기치로 내건 상황이어서 재계 시선은 온통 국회로 쏠려 있다.
더욱이 각 상임위별로 주요 그룹 회장들을 증인으로 채택할 예정이어서 이를 막기 위한 재계 움직임도 한층 긴박해졌다. 현재 삼성, 현대·기아차, SK, LG, 롯데 등 재계 서열 10위권 내 그룹들은 대관팀을 풀가동하며 관련 정보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룹 최고위층 인맥들 또한 '회장님 지키기'에 총동원된 상황이다.
대관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한 그룹사 관계자는 "죽을 맛"이라고 했다. 추석 명절 분위기는 잊은 지 이미 오래. 그는 "국회 분위기가 예전과 다르다. 대선 직전이라 살벌할 정도"라며 "사장단 등 실무진이 출석하는 정도에서 막아야지, 더 이상 고위층으로 올라갔다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현실적 방도가 거의 전무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일선을 총괄 지휘하는 한 그룹사 고위 관계자는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 의원에게도 접근이 용이치 않다"면서 "자칫 로비로 왜곡될 수 있어 친밀성을 따져 신중히 접근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또 다른 그룹사 관계자도 "마치 죄인이 된 기분"이라며 "재계를 때려야 표가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불평했다.
국감을 준비 중인 한 초선의원도 이 같은 분위기를 일정 부분 인정했다. 그는 "누구든 국감스타, 청문회스타가 되고 싶은 건 마찬가지 아니겠느냐"며 "특히 초선의 경우 경쟁이 심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쨌든 경제민주화 기류, 대선 정국과 맞물려 재계로선 이번만은 칼을 피하기 힘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당을 달리 하는 또 다른 중진 의원은 "재벌 총수가 나올 때 (여론의) 주목도는 급격히 상승한다"면서 "정주영을 호통 치는 노무현의 모습을 눈앞에 그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대선이 맞물려 있다 보니 증인채택에서부터 재벌개혁에 대한 여야 지도부의 의지가 평가대에 오를 수밖에 없게 됐다"며 "예전처럼 적당히 넘어가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주요 상임위 가운데 가장 적극적 움직임을 보이는 곳은 환경노동위원회다. 민주통합당 등 야당에서 신청한 증인 숫자만 110명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신계륜 민주당 의원이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는데다 여야 비율 또한 7 대 8로 야당이 우세해, 야권의 입김이 관철되기 쉬운 환경을 꾸렸다.
야당 명단에는 정몽구 현대차(005380)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사장, 조양호 한진(002320)그룹 회장, 이석채 KT(030200) 회장, 손경식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상임위 관계자는 "초기엔 이건희 회장도 포함됐는데 아들(이재용) 선으로 한발 물러섰다"며 "나머지 회장들은 빠지기 힘들 것"이라고 전했다.
때문인지 심상정 의원은 26일 환노위 전체회의에서 비정규직 문제와 삼성전자 백혈병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며 "정몽구 현대차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만은 증인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심상정, 은수미 두 여걸 외에 홍영표, 김성태 등 노조 출신 여야 의원들이 버티고 있기에 위력은 한층 배가될 전망이다. 이들이 파견근무를 불법으로 규정한 대법원 판결을 기초로 정 회장에게 "법 위의 재벌"이라고 몰아붙이고, "직원 생명을 경시한다"며 이 사장을 추궁할 경우 해당 기업의 곤혹스러움은 극한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정무위원회도 상황이 녹록치 않다. 야당은 이건희·정몽구 회장 외에 최태원 SK(003600)그룹 회장, 구본무 LG(003550)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이들 외에도 KT, 신세계(004170), 현대건설(000720) 등을 비롯해 대형 금융지주 회장들이 줄줄이 증인신청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정무위 소속 야당 의원들은 특히 계열사 일감몰아주기 등 내부거래 상위 5대 그룹을 대상으로 불공정 행위에 대해 집중 추궁한다는 방침이다. 또 빵집 등 무분별한 동네 골목상권 침해에 대한 질타도 잇따를 예정이다. 여당 또한 여론 눈치를 빌미로 거센 반발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어서 이들 중 상당수 회장들은 국감장에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커졌다.
지식경제위원회는 재계를 대변하는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불러 동반성장에 대한 재계 확답을 촉구할 예정이다. 일감 몰아주기도 집중추궁 대상이다. 특히 전경련이 그간 경제민주화를 규정한 헌법 119조2항에 반발하는 등 재계 입장의 선봉에 서 있다는 점에서 압박 수위가 높아질 수 있다. 또 소속 의원들의 자료 요구에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하면서 지경위 전체가 단단히 벼르고 있다는 후문이다.
반면 기획재정위는 맥 빠진 국감이 될 전망이다. 당초 기재위는 순환출자 금지, 지주사 전환 등 지배구조 개선과 관련해 각 그룹 총수들을 국감장으로 불러들일 계획이었지만 결국 불발됐다. 24일 전체회의를 통해 1차 확정된 증인과 참고인은 각각 6명과 5명으로 이중 재벌그룹 총수는 포함되지 않았다. 다만 2차 증인 검토 대상으로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최지성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이 포함됐다.
한편 재벌 총수에 대한 증인 채택이 현실화될 경우 해당그룹은 최종 카드로 '해외 출장'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단 대관팀 등 담당 부서와 그룹 최고위층에서 막되, 여의치 않을 경우 해외출장 카드를 빼낼 것이란 게 복수의 관계자 전언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무조건 회장 출석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이 경우 국회도 할 일을 다 했다며 체면치레를 할 수 있다"며 "여론의 지탄은 뒤따르겠지만 회장을 보호하는 유일하고 실질적인 방법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아직은 확정된 게 없다"며 "국회 상황을 보고 난 뒤에 대응책을 논의하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앞서 전경련, 대한상의, 경총 등 경제5단체장들은 25일 이명박 대통령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정치권의 경제민주화 논의로 기업들 의욕이 상실되는 측면이 있다며 최고 권력자의 병풍을 기대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이들은 또 대내외 경제위기 상황에 기대면서 성장과 안정을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내세웠다. 특히 국회의 기업인들에 대한 과도한 출석 요청이 경영활동 위축을 가져올 수 있다며 이 대통령의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안방에서 전면전을 치르겠다'는 창의 공세에 '일단 피하고 보자'는 방패의 수싸움이 국정감사를 앞두고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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